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때 프랑스 칼레라는 곳은 영국군에게 패배했고 시민 전체가 학살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영국 왕은 이 도시 안에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여섯 명만 있다면 시민을 학살하는 것은 철회하겠다고 했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생 피에르가 목에 밧줄을 두르고 나왔다. 그다음에 칼레 시장이 나왔고 속속 칼레사회 리더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고 앞으로 나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여기서 생겨난 시민 정신이다. 영국 왕은 약속대로 그 희생정신을 인정해서 이들을 석방했고 시민들도 위기에서 면하게 되었다. 그것을 소재로 한 것이 로댕의 군상 칼레의 시민이다.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 진품이 있어 정원에 상설전시되어있다. 비 오는 우에노에서 비를 맞고 있던 칼레의 시민을 감상했던 것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칼레의 시민은 분명 고귀한 헌신과 희생을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딜레마도 함께 말하고 있다. 이 여섯 명의 영웅은 전혀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로댕이 묘사한 영웅들은 전혀 영웅답지 않다. 로댕이 이 작품을 공개했을 때 칼레의 시민들은 이 작품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시민들은 칼레를 건진 영웅을 겁쟁이로 만든 로댕을 비판했다.
로댕은 왜 영웅을 만들지 않았을까? 로댕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고귀한 가치에 자기를 드릴 수 있는 희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했다. 소재 자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댕은 그 헌신과 용기에 있어서도 스스로도 견딜 수도 없는 죽음의 공포에 뒤덮여있던 인간적 현실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풀려버린 다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을 들어 올려 희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섯 명의 영웅의 내면일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과연 두려움은 없는 것일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용기가 비로소 용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분명히 영웅이었지만 또한 틀림없이 두려워하고 있던 인간이었다. 로댕은 이 작품을 높은 곳에 올리지 말고 지면에 설치하고 싶어 했다. 높은 곳에 말에 타고 있는 늠름한 영웅의 군상이 아니라 내 앞에서 바로 내눈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나의 친구와 같은, 마치 나의 가족과 같은 여섯 명의의 인간의 눈에 비겁한 우리들의 시선을 맞추어보자는 것이다. 영웅을 우러러볼 수는 있겠으나 나 대신에 죽으러 가는 친구의 눈을 감히 바라볼 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다. 하나님 본인이신 본질이 결코 변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철저히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인간의 어머니의 태에서 울면서 태어났고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빨면서 성장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경험했고 수고와 고생의 삶을 살았다. 슬플 때도 있었고 두려울 때도 있었고 눈물도 흘렸다. 성육신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성육신의 방법은 하나님의 전능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을 통해 유한하고 연약한 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육신의 결과이다. 이미 인간이 되었다라는 것이 성육신의 현실이고 예수님은 그 현실 위에서 구원의 일을 하셨다. 신적인 초월이 아닌 인간의 자리에서 그 일을 순종하신 것이다. 맞으면 아프고 찢기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틀림없이 두려워했다. 두려웠던 나머지 지극히 인간적으로는 제자들에게까지 의지했다. 나를 위해서 잠시라도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해 달라고. 인간 예수를 만나는 것과 하나님이신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과 두려움을 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순절이 되어야겠다. 그 두려움이 내 영혼과 육체에 전해지는만큼 속죄의 감사와 기쁨은 커질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