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스바냐 1:14~2:3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지어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의 시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쇠퇴하고 아직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 남유다에 단 3명뿐이라던 선한 왕 중의 한 명인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하던 때입니다. 스바냐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은 심판의 날입니다. 요시야 왕이 개혁을 추진하지만 그것은 미완으로 끝나고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그날이 임박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1:17,18」 그것은 유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멸망은 바벨론에 의한 것, 로마에 의한 것만이 아닙니다. 멸망은 누구에게나 예정된 것이고 심판은 시시각각으로 임박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멸망의 예고 가운데 「혹시」라는 부사가 가지는 소망은 큽니다. 그러나 이 「혹시」는 「혹시 하나님이 마음이 바뀌시면」이 아니고 「혹시 너희가 회개하면」입니다. 혹시의 주체는 멸망으로 향하는 백성입니다. 그들이 혹시 회개할 수만 있다면 여호와의 날은 진노의 심판의 날이 아닌 하나님이 숨겨주시는 구원이 날이 될 것입니다. 「혹시」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의 조건은 자신의 수치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 겸손과 공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회개라는 말은 항상 있지만 도덕적 반성과는 다릅니다. 변화의 의지도 없는 상투적인 자아비판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의미로 회개라는 것은 일생에 몇 번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혹시」 회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0BHsV69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