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시편 47:1~9
47: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47: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47: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47:5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47:7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47:8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47:9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표현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천상의 무엇이 아닌 인간의 소통체계인 언어로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 읽고 이해하는 것을 늘 나중으로 미루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인간의 언어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과 같은 신적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언어로 소통하시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갈 때는 오직 자신의 언어로 나갈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지만 나의 맞춤법과 발음, 그리고 나의 사투리 억양까지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가 됩니다.

 

선교사들은 문맹의 사회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를 이해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역사 위에 신앙은 항상 있었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통 수단인 언어로 계시하셨고, 우리는 그 언어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과라서…」라는 핑계를 항상 듣지만, 전공의 문제는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기술과 미디어의 발달로 활자를 읽지 않고 이미지로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저항해야 합니다.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특권을 버리면 이미지와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서 이해가 종속되어 버릴 것입니다. 마치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오늘 본문에서 「찬양하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זָמַר 자마르」 입니다. 「찬양하다, 노래하다, 연주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시로 찬양하라」고 되어 있고 어떤 번역은 「노래하라」로 번역했습니다. 굳이 분야를 나눈다면 문학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분야로 한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언어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음악은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 그 음악 위에 시가 덧입혀지면 뜻이 담긴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악기를 이용한 연주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선율을 짓고 시를 지어 그것을 연주하고 노래하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은 원래 종교의 경전이 아닙니다. 시를 짓는 사람과 음악을 만드는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들과 예배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예술의 결과물입니다. 음악은 신비한 것이어서 마음이 공감하고, 감정이 북돋아지고, 흥겨워지고, 금방이라도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은 감성의 도구가 됩니다. 다윗은 군인이며 정치가였지만, 저는 수금 연주자, 시를 쓰는 문학가, 작곡가였던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 데이빗을 좋아하고, 예배 음악을 만들고 지휘하던 프로듀서 데이빗을 좋아합니다. 역대상에 보면 예배음악을 만드는 다윗이 얼마나 꼼꼼한지 모릅니다. 언약궤를 찾아올 때는 댄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고난의 삶에서 다윗을 지켜준 것은 다윗의 예술성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술로 고통을 토해낼 수 있었으므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7편은 다윗의 시가 아니지만 고라의 자손에게도 그 동기와 의미는 같습니다.

 

예술이란 원초적인 인간의 몸부림 같은 것입니다. 일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합법적인 현실도피의 출구입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갈 수 있다면 우리의 짜여진 삶에서 이탈하여 숨을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목욕을 할 때 몸이 이완되듯이 음악을 감상하며 긴장된 마음을 이완할 수 있습니다. 예술과 종교는 원래 태생이 같습니다. 자신의 감성을 최대한으로 하여 그것을 표현하는 작업은 예술과 종교가 쌍둥이입니다. 그러니 의식화되고 경직된 종교 또는 반듯한 규범적 예술은 다 모순입니다. 음악에 문외한이던 저는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문득 찬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해서 그날 밤에 기어이 손가락에서 피가 났습니다. 그 덕분에 그날 밤 가장 단순한 곡 한 곡 「오 이 기쁨」을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이 기쁨! 기뻤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시의 시작은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입니다. 숙달된 기예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손바닥을 치면서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는 것」 그것이 찬양입니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6」 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지식과 감성을 동원하여 언어로 표현하고 음악으로 표현하고 영화와 미술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내고 공감하는 것도 표현입니다. 시각과 청각,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생성형 AI가 오만 것을 다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술 활동도 하고, 시도 쓰고,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합니다. 찬양시도 짓고 찬양곡도 만들고 부르겠지만, 비인격이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빅데이터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크신 하나님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언어, 나의 시, 나의 노래, 나의 눈물과 나의 기쁨과 소망으로 나는 나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