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시편 69:13~28
69:13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69:15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69: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 하소서
69:19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69:20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69:22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69: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69:24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69:26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69편의 시인의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수렁에 빠졌고, 물에 빠졌습니다. 큰물이 덮치고 웅덩이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피해야 하는 방법은 경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공감하지 않으려면 애당초 시는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름의 경험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기어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은 수렁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있고, 열병이 나서 사경을 헤맨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력한 공포를 기억합니다. 그 두려움과 절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뿐더러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 각자의 입장에서 누구나 자신의 절벽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잘하고 못하고는 일상이라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하나 박탈하시면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일상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위기에 처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을 요청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7」 하나님은 그때 간절한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21절의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34절에서 「그들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으나 맛보신 후에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저주받은 고통과 벌거벗은 수치 속에서 하나님과의 격리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없습니다. 죽기 위해 나무에 달렸으니 고통을 당하고 거기서 죽어야만 합니다. 조금도 위로받지 못했고, 아무런 구원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세상 죄를 뒤집어쓰고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절규했으나 하나님에게 닿지 않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고 한탄했습니다.

죄는 단 한 번도 용서받은 적이 없습니다. 죄의 값을 치렀을 뿐입니다. 용서해 준 것이 아니고 법적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쓴 인간이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더라도 그 소리가 하나님에게 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죄값이 완전하게 지불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순서대로 용서가 시작됩니다. 간절한 구원의 소망은 이미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죄값을 완전하게 지불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죄 있어도 부를 수 있습니다. 흠 있어도 부를 수 있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죄를 해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의 때마다 예수님 등에 업히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