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시편 40:1~10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0: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40: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9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40:10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는 것은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위기입니다. 웅덩이와 수렁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다윗은 기도했고 결국 죽을 것 같았던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어나왔습니다. 급할 때는 무신론자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을 잊고 자기세계 안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하나님께 겸손히 굴복하는 자, 즉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 읽을 수 있는 다윗의 대척점은 아마도 불한당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던 것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세력이 아니고 내부의 질투와 배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가진 종교적 배경은 다윗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여기로 끌어와 말한다면 다 교회다니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종교의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없어서 종교를 업고 악을 행합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식주의, 공로주의로 흐른다면 결국 신앙이라는 내용은 담을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을 내는 것으로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없으면 형식은 지루하고 불편해질 것입니다. 믿으면 되지 왜 예배에 가야 하는가. 왜 헌금을 내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다윗보다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을 많이 드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결과이지 그것이 신앙을 측정하는 척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소속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9절 이하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마땅히 그 은혜를 증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보다, 헌물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중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어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구원이라고 말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 감격이 있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