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장 1절-131장3 절
130:1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130: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130: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130:8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시를 라틴어로 데 프로푼디스 (De profundis) 라고 하여 심연의 시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깊은 성찰과 고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시편에서 연옥의 교리를 만들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읽어보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버둥 같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자리에 서 있고 주어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심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과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저 입이 기억하고 있는 기도를 절제해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고 그것을 다듬어 완성해가듯이 기도는 고민과 생각이 반영되어 믿음의 표현으로 다듬어져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죄를 많이 짓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 많이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를 인식하는 곳에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만,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지 못한다면 은혜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죄를 모르면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을 짓누르고 있는 죄의 무게라는 것은 인간이 견뎌내기에 버겁고 무서운 것입니다. 알량한 도덕의 가면을 썼을 뿐 영혼은 죄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회가 용인한 범위 안에서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것을 도덕적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학교에서는 인간다움을 배우기 전에 국가에 필요한 국민 윤리와 이념에 필요한 반공 도덕을 배웠을 뿐입니다. 도덕 교과 시험문제에서 북한을 비하하는 답만 찾아 쓰면 항상 만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근본적인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모랄은 고민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서 인간은 일차적으로 절망을 경험합니다.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전제는 반드시 절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절망이 아니라면 구원이라는 이름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죄의 자각 그것이 곧 구원의 소망이 됩니다.
죄에 관한 한 완벽하게 무능하고 절망적인 인간의 비참을 깨달은 인간은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죄의 무서움에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입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소망 없는 죄의 밤을 지새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불침번의 지친 고뇌처럼 죄 많은 인간이 구할 것은 오직 죄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