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6:20-25
6: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6: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6: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6:23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하심이라
6:25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
일본교회의 고민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교회의 고령화입니다. 성도가 고령화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젊었던 성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늙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문제는 얼마 되지 않는 빈자리조차 다음 세대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사이즈가 다를 뿐 경향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주어진 시대와 놓여진 지역에서 차세대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책임이었고 교회의 존재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발 더 차세대 선교의 안을 들여다보면 성도들의 가정에서 이미 자녀들에게 신앙 계승이 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출석하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이 중학생 이상이 되면 교회에서 떠나갑니다. 목사의 자녀들만 어쩔 수 없이 남아있습니다.
자녀들은 일본 사회와 교회라는 이중 문화 안에서 혼란과 곤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일본의 이지메 문화는 청소년기의 폭력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근저에 녹아있는 전체주의적 배경에서 나타나는 소외현상입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서 주류로 편입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공적으로 드러내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부모는 다원화된 세계 안에서 자녀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녀를 놓아주었습니다.
저는 자녀에게 부모의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신앙은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녀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자립적 선택이 가능한 환경과 교육을 제공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합니다.
아직 주일학교가 존재하는 교회에서는 성도 가정의 자녀들 소수가 모여서 주일 아침에 어린이 예배를 드립니다. 어른들도 오지 않는 일요일의 이른 시간부터 아이들은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린이들의 믿음이 좋아서 일찍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의 예배 시간과 공간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는 그러한 주일학교에 신앙교육을 위임했습니다.
교회는 그 아이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의 신앙교육에 얼마나 진지했는지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고 뻔한 교훈적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컸고 예배당에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복음을 알고도 떠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아직 알지 못하는데 떠나보낸 것입니다.
아이들도 모여야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가정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에서도 주변인으로 있다가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교회는 패배 의식에 갇혀서 아이들에게 더 넓고 다양한 환경을 제공해주려는 도전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떠난 것은 자녀들에게 출애굽의 이야기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이야기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오히려 그것을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부모가 신앙과 세상을 둘로 이원화했기 때문에 가랑이가 찢어지면서 세상으로 떠난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부모라면 언젠가 자녀들은 부모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을 통한 홍해 이야기가 아닌 나의 출애굽과 나의 홍해를 말해야 합니다. 오늘 읽는 신명기의 명령은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고 가르칠 수 있는지를 부모에게 물어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