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19:1-14
19: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 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
19: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19: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19: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위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인 일,
19: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19: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19: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19: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19:9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9: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19:11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 하거든
19: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9: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1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율법에는 도피성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읍을 구별해야 범죄자의 도피처로 설정해야 합니다. 이 도피성에 대한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여호수아 20장, 민수기 35장에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간다고 해서 죽음을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고의적 살인을 한 경우에는 공의의 율법에 의해 자비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즉 신명기가 예를 들듯이 도끼로 벌목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나가 이웃을 죽게 하는 경우 등의 과실치사에 한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비의 도피처 제도가 적용됩니다.

 

동태보복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말라는 동태보복법입니다.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이 당시의 정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내에 도피성을 지정하여 과실치사의 동태보복을 허용하지 않고 범죄자의 생명권을 보호했습니다. 보복하는 자가 좇아올 때 도망해야 하는 길이 너무 멀면 도상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도피성을 구별하여 그곳에서는 복수의 피를 흘릴 수 없게 한 것입니다. 이는 사회질서와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입체적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동태보복법으로 끊임없는 복수와 증오가 반복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동태보복법에 대한 재해석은 특별합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8-39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분노를 피하는 임기응변 같으나 핵심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도피성과 증인 제도는 구원받은 백성의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의 피난처인 도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권이 보호되는 우리의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도피성으로의 피신을 용납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긍휼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평화이고 사랑입니다.

 

몇 년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수배 후 조계사에 몸을 숨긴 적이 있습니다. 조계사도 난처했으나 시국 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때이기는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시절에 학생과 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이후 노동권과는 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래서 노총 위원장은 명동성당으로 가지 않고 조계사로 간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계사가 언제나 범죄자 은닉에 이용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단이기주의적 범법에는 오히려 경내에 경찰력 진입을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비록 실정법 위반이라고 하더라도 범죄자가 도망갈 수 있는 최후의 피난처는 가톨릭과 불교뿐이라는 말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간해서 교회로 숨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회가 이미 정치화된 종교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법치국가에서 종교시설을 예외적인 성역으로 두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를 인정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도망갈 곳 없는 비참한 자의 피난처라는 것을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날 버려도 예수 날 버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