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25:11-19
25: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남편을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25: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보지 말지니라
25:13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25:14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25:15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 하리라
25:16 무릇 이같이 하는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25:17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25:18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남편이 다른 남자와 싸우는 일로 위험해질 경우에 그것을 보고 있던 아내가 싸움에 끼어들 수는 있겠으나 상대편 남자의 음낭을 잡은 경우는 처벌이 강력했습니다. 여성이 상대 남성의 음낭을 잡았다는 것은 남성 중심사회에서는 남성에 대한 모독이었을 것이고 이른바 외간 남자에 대해서 여성이 해서는 안 되는 비도덕적인 행위였을 것입니다. 이 규례에 대해서 현실과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대와 현실과의 괴리가 아니고 사실은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도에서 한 할머니가 50년 전에 성폭행에 저항하여 폭행범의 혀를 깨물어 자른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폭행은 여성이 당했지만, 남성의 상해가 중대해서 여성이 가해자로 처벌을 받았고 여성은 그것으로 삶의 단추가 불행으로 끼워졌습니다. 50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그것에 대한 명예회복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형법상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상당한 이유」라는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아서 집에 들어온 도둑을 무력화히기 위해 때려잡아도 잘못하면 도둑에게 폭행으로 고소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한 것은 법의 한계를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법은 보편적 가치의 합의를 위한 사회적 절차입니다. 법을 정의(正義)로 정의(定義)하지만, 사실 법으로는 모든 이를 만족하게 하는 최대한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법의 강제력을 통해서 불의와 불행을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그것을 억제하려는 법률의 역학 안에서 불과 수십 년 전,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성적으로는 남성 중심의 사회이고 정당방위라는 것은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이 여성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은 지금까지 읽어 온 신명기의 정신에서 볼 때 남성 우월이나 법적 한계 때문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남성의 급소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계대결혼의 규례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대를 잇는다는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공유하는 사회입니다. TV등에서는 여성이 남성의 급소를 걷어차는 장면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자주 연출되지만, 남성의 급소는 크지 않는 충격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율법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형제입니다. 내 남편을 위해서 타인의 급소를 공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겁이나 비열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대결혼을 통해 죽은 자의 대를 이어주는 것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형제에 대해서 비열하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생식능력의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공격은 비열한 것이 됩니다. 오늘 이어지는 본문도 비열하지 않을 것에 대한 법들의 연속입니다. 비열하게 저울을 속이지 말 것과 비열한 방법으로 약한 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규례가 따라 나옵니다.

 

저울을 달 때의 마음은 공평과 정직입니다. 약간의 이익을 위해 형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자신에게 가장 큰 비겁을 행하는 일입니다. 은행은 돈을 많이 빌려 가고 때에 맞추어 잘 갚으면 신용을 좋은 것으로 평가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용은 그것으로 측정할 수 없는 정직과 투명성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말렉이 후미에 낙오하여 무방비 상태이던 이스라엘을 공격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 비열함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인간관계의 시시비비에 있어서도 경제적 이해에 있어서도 비열한 방법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신용평가를 받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