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1:9-18
31:9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31:10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31: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31: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31: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31: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렀더라
3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31: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 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31: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율법을 기억하고 살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말을 기록해서 책으로 만들고 그것을 보관하여 모든 이스라엘을 정기적으로 모아놓고 그 앞에서 낭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죽어야 하고 더 이상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죽음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의미하는 것은 율법의 성문화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그것을 읽고 배우면서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모세 사후의 변화와 혼란을 대비하여 모세가 마지막 순간까지 율법을 듣고 읽고 알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이 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세의 열심과 하나님의 비관이 이 본문 안에서 교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패역하여 사실상 율법을 잊어버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언을 하십니다. 그것은 모세의 노력을 무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마도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차세대 리더십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
모세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광야의 삶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여호수아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차세대 리더입니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 아니고 법은 불완전한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과거완료형으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으로 여전히 타락해가는 존재입니다. 죄는 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율법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지만 자신만을 사랑할 때 율법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일본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사카구치 안고는『타락론』에서 전후 일본의 타락상을 고발했습니다. 「반년 사이에 세상 변했다…인간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러한 것이며 변한 것은 세상의 겉껍질일 뿐이다….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의사도 성녀도 타락한다. 그것을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럼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인간은 살고, 인간은 타락한다. 그 진실 이외에 인간을 구원할 편리한 첩경은 없다…전쟁에 졌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타락하는 것이며 살아 있기에 타락할 뿐이다. 하지만 영원히 타락하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가녀리고 위약하며, 그 때문에 어리석은 존재지만 완전히 타락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다.」
문장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다면 설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작가는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로서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타락론은 염세적이지 않고 오히려 미래 지향적입니다. 인간의 타락을 인정함으로 새로운 윤리적 질서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성문화된 율법을 읽게 한 것에도 인간은 타락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7년에 한 번 다시 윤리를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완전한 사람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은 없습니다. 돌이켜야 할 뿐입니다. 사카구치가 생각했듯이 그럼에도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타락에 지친 인간은 다시 회복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타락을 자각한 인간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돌이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