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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었을까?’ 믿음의 세계에서는 비웃음을 당할만한 말이다. 회심에 관해서는 언제나 ‘나는 왜 하나님을 믿었을까’ 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 즉 믿음은 어떠한 경위로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답일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는데 이래저래 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만 하기 때문이다. 둘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둘의 패러다임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해 낸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도 완벽하게 증명해 낼 수 없다. 그것에 있어서는 서로 공평하다고 하겠다. 학교 다닐 때 한번은 들어봤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아퀴나스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섯 가지 논거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이다.

「1.모든 사물은 움직인다. 운동하는 사물은 운동하도록 만드는 자에 의해서 운동한다. 운동하도록 만드는 자의 퇴행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일의 원동자 즉 운동을 하도록 만드는 첫 번째 것이 존재한다. 이 존재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2.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것은 그것에 의하여 생겨난다. 원인의 퇴행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있도록 한 최초의 능동적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제일의 능동 원인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3.세상에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물들이 있다. 이런 것을 우연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우연적 사물들의 근원이 되는 필연적인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필연성은 퇴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인 하나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존재를 하나님이라 한다. 4.우주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완전함의 기준이 있어야 된다. 그 완전함의 정점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5.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 활동한다. 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따라 활동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그 목적을 정해주고 이끌고 활동하도록 만드는 어떤 지적인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이 존재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

자 이제 하나님이 증명되었는가? 아퀴나스의 논증에 대해서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유신론의 논증을 전개했을 뿐이다. 증명은 할 수 없었을 뿐더러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증명된 것에는 이미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것으로 자신이 완전하게 증명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칸트는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추론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라든가 생명이라든가 우주 또는 시간과 같은 무한의 개념을 논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속성은 틀림없이 무한이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무한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증명할 필요조차도 없는 유한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18세기 칸트 이후에 이성은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을 사실상 포기했다. 우리만 그 문제를 끊임없이 소급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인생이 결코 논리적이지 않듯이 말의 논리로 하나님을 증명하기에 인간은 분명한 한계에 도달한다. 적어도 나처럼 논리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사람에게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은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파스칼도「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은 사람들의 논리에서 멀고 또 복잡한 것이어서 감동을 주지 않는다. 혹시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그 증명을 듣고 있을 때뿐이며 그들은 한 시간 후에는 속았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이성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했다.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귀결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나 역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면 나를 통해서 그 사랑이 증거되는 것이지 존재를 현상적으로 증명해내는 것은 아니다. 변증은 언제까지나 방어이지 공격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 안에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변증의 한계이다. 오히려 공격적인 것은 변증이 아니라 증거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뇌는 하나님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논거의 부재와 변증의 실력 없음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지 않는 비겁함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하나님을 증명하는 이 방법의 우월성」이라는 제목으로 증거했다. 이 증거말고는 하나님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믿는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하나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었을까?’ 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증명과 확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라는 매력에 이끌린 것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그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랑이 발견된다. 물론 내 주위에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말싸움으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