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열왕기상 16:15~28
16:15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16:16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16:17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쌌더라
16:18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16:19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하였더라
16:20 시므리의 남은 행위와 그 모반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21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
16:22 오므리를 좇은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은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16:23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동안 치리하니라
16:24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16: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16:27 오므리의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28 오므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합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아사의 반역에 의해서 죽으면서 여로보암 왕조는 끝이 납니다. 바아사 왕조가 시작되지만 바아사 왕조도 자신이 배신한 그대로 배신당하면서 단명으로 끝납니다. 바아사의 신하 시므리가 바아사 아들 시대에 반역에 성공했고 바아사 왕조에 속한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시므리가 그렇게 해서 잡은 왕권의 생명은 단 7일간이었습니다. 시므리는 왕이 된 지 7일 만에 오므리의 반역으로 죽습니다.

 

권력을 탐하는 군상의 퍼덕거림이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습니다. 19절은 7일 천하를 누린 시므리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하였더라」 여로보암의 길은 참 넓고도 큰가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로보암의 길, 반역의 길을 걸어가다가 멸망의 종점에 다다릅니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배신의 물레방아 같은 것입니다. 배신은 항상 있습니다. 브루투스는 사랑하던 시저를 죽이면서 「당신을 사랑하지만 로마를 더 사랑한다」고 했지요. 어떤 이는 독재와 폭정을 막기 위해서 배신해야만 했고 어떤 이는 욕심에 눈이 멀어 은인을 배신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배신하는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배신에 놀라지 않을 수 있다면 인간에 대해서 잘 이해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역린의 길입니다. 배신했으니 배신당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배신당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의 반대말은 르호보암의 길이 아니고 다윗의 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사울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윗을 반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신에 대해서 성경적 가치관은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배신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진보를 위한 배신인지, 인간의 욕심을 위한 배신인지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겁인지 순종인지도 분별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었던 여로보암의 길은 지금도 있는 탐욕과 배신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지 않으렵니다. 모질게 배신당하지만 자신은 배신하지 않고 살았던 길, 인내하며 걸었던 그 다윗의 길. 배신당한 예수의 길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