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3:10~20
23: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23:11 또 유다 열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시종 나단멜렉의 집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수레를 불사르고
23:12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
23:13 또 예루살렘 앞 멸망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23:14 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곳에 채웠더라
23:15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23: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23:17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23:18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23:19 전에 이스라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3:20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고대 근동의 신앙 인식 체계는 사회 공동체 중심이었고 성전 중심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중세는 교회 중심이었고 성직자 중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의 규제를 받았고 성례전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앙이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각자가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개인의 양심과 신앙적 결단이 더 중요해집니다. 계몽주의와 근대 철학의 영향은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복음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대가 변화하는 것이고, 그 요구에 따라 신앙의 표준 접속 코드가 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고민을 했습니다. 산업화의 시대에서는 도시화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인식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 교회는 그 맥락 안에 있었습니다.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예배, 행사, 봉사의 정례적인 활동과 공동체 소속과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그 틀과 의례 안에서 신앙을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작용했지만 현대의 개인주의적 경향과 디지털화된 환경 속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젊은 세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신앙을 인식할 체계, 접속할 코드를 찾지 못하고 교회 밖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철저히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우상 숭배의 근거들을 제거하고 이방 신들의 제사장들을 처벌하고 산당을 무너뜨렸습니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일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근간을 파괴한 후에는 새로운 신앙의 인식 체계가 마련되고 생산적 활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에는 분명히 속 시원한 파괴는 있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안은 의례나 의식적인 것이 아니고 지적인 것이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담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은 요시야와 같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혁하려고 하지만 신앙을 인식할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괴적 개혁은 기존의 체제를 철저히 무너뜨리려는 강력한 의지로 시작하지만 새로운 대안이나 체제를 세우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과 불안정을 초래합니다. 대체할 것을 제시하지 못하면 파괴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잠복해 있다가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외적 변화, 파괴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창조와 말씀 중심의 재건이 동반될 때 지속적인 개혁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상을 때려부수는 것 보다 적극적인 개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적으로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