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예레미야 29:15~23
렘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렘29: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렘2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렘29:18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주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렘29: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29: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렘29: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렘29:22 너희 바벨론에 있는 유다 모든 포로가 그들로 저주거리를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렘29: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니라 나는 아는 자요 증거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였더라

 

구약 안에는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알의 선지자나 아세라의 선지자,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에 대해서 모두 단 하나의 명칭인 「선지자」를 사용합니다. 다만 「내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을 수식해서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는 신분상의 구분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물론 부정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사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 선지자라는 이름표를 목에 걸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거짓 선지자의 의도가 사기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참 선지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속이고 또 속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확증편향에 빠진 목회자들은 설교해야 할 강단에서 근거도 출처도 알 수 없는 정보로 정치적 연설을 하고 그것을 비난받으면 스스로 박해받는 선지자라고 자부합니다. 자신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이고 정체적인 신념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선동되어 추종하는 백성들을 간단하게 선과 악, 믿음과 불신앙으로 이분화할 수는 없습니다. 깨우치면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둘러싼 해석과 판단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는 어떠한 인물이 말하고 있는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 동안만 하나님의 참 선지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해병대 출신와 목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고 말하듯이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입니다. 단순 비교해보면 일본에서는 목사직에서 퇴직하면 목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는 일본인 목사님 중에 후임이 없어 70대를 훌쩍 넘기고 은퇴하셨는데 여러 사정으로 목회하던 교회에 성도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분들과 후임 목사가 그 전임 목사에 대한 호칭을 「○○형제」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어에는 「님」조차도 붙지 않으니 더 어색했습니다. 목사는 그만두었고 집사나 장로가 된 적도 없으니 새신자와 같은 호칭인 형제였습니다. 물론 형제라는 호칭이 집사나 장로나 목사보다 하등한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느 것도 우월한 계급을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라면 원로 목사가 되어 담임목사보다 큰 방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 교회의 정서에 익숙한 저로서는 적지 않은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학과 문화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로 보면 목사라는 직분은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한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원로 목사라는 제도는 은퇴하려는 목사들의 미련과 욕심이 만들어낸 한국적 산물입니다. 이것은 교회 리더십 이양과 시대마다 필요한 교회의 개혁에 오히려 방해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것은 다음 세대에게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선지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 지금까지 믿어왔던 사람이 선지자가 아니라 주어진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 선지자의 끝 또한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번 선지자라고 해서 영원히 선지자의 정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인물을 참 선지자로 규정하고 의심 없이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 됩니다. 의심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민이 civil servant 를 뽑아 정치와 행정에 필요한 권력을 위임해주지만, 그 권력으로 인해 변질하고 부패한다면 다시 교체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선지자는 결코 목사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직분과 신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성경과 시대를 읽어내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목소리가 크고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위기에 처해있는 교회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현상을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말들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논리가 있고 나름의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현상과 여론이 아닌 성경과 시대를 기준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시대 정신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양이지 양을 방해하는 염소인지를 매일 물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는 성경적 기초 위에 정당한 해석인지 자신의 생각인지를 매일 확인해야 합니다. 선지자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