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오바댜 1:1~14
1: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1:3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5 혹시 도적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1:6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 되었는고
1:7 너와 약조한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이기며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 함정을 베푸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1:9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에돔은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의 나라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는 자주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였으나 그들이 서로 핏줄이 섞인 형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 에돔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당할 때 바벨론과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고통을 즐겼습니다. 이스라엘을 약탈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의 침략자로부터 도망칠 때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그들을 잡아 바밸론에게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에돔은 고지대의 요새에 있었습니다. 그 지리적 조건에 자만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이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0」 하나님은 오바댜를 통해서 그것으로 인한 징계를 예언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사실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에돔을 지나가기를 원했으나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사울 때는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에 자주 전쟁이 일어났고, 다윗과 솔로몬 때는 아예 에돔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는 다윗의 군대가 에돔을 많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피를 나눈 에서의 나라라고 하더라고 국제적 이해충돌이 있다면 갈등할 수도, 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할 때 바벨론에 붙어서 피흘리는 유다의 고통을 즐기고 약탈하는 모습은 비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쟁의 관계에서도 경우와 윤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죽이지 않을 수 없더라도 잔인하지 않아야 하고, 돌아서더라도 비열한 배신의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복잡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질투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그 고통을 즐기는 행동을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해로움을 의미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의미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진 말입니다. 최근 일본의 인터넷 세계에서는 「메시우마」라는 속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밥이 맛있다는 말인데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문맥에서 사용하는 말로 샤덴프로이데와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있지요. 남의 불행을 구하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고 남의 형통을 질투하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그런 악마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한편으로 그럴 수도 있지요. 감정의 공방을 멈추고 측은하게 여기고 도움의 손을 내밀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둘 다 가능합니다. 다만 어떤 인간으로 사는가를 결정해야 할 뿐입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돌이키실까 두려우니라. 잠언 24: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