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5:10-28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빌미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침받은 병자에게 「안식일에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38년간을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회복된 현장에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재산을 운송하는 노동에 해당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침받은 병자는 「자신을 낫게 한 분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변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극적인 대응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다시 그를 만나서 「네가 나았으니 이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므로 그 분이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여기 고침받은 병자의 경우는 자신의 삶에서의 직접적인 범죄함 때문에 육신의 질병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그를 찾아서 다시는 죄를 되풀이 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물론 죄와 병의 관계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9장에서는 사람이 병든 것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했기 때문인가를 따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구체적인 병과 죄 사이에 단정적인 관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질병에 걸리고 결국 죽게 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에서 기인한 결과입니다. 질병과 죽음은 에덴의 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분명한 이해, 그리고 그 죄는 인생을 구성하는 육체와 정신과 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죄가 내재되어 있고 그 죄를 제어하지 않고 허용해 버리면 인간은 자신의 가는 길에서 불행과 고통을 마주해야 합니다.


고침받은 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님이었을 고하였습니다. 사회로 복귀하려는 한 사람의 약점을 잡아 예수를 정죄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회유 내지는 협박이 있었겠지요. 이러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은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열은 곧 지혜입니다.


그래서 고침받은 병자는 예수님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가지고 가서 밀고 했습니다. 행각에 드러누워서 남 탓만 하고 살고 있던 것보다 더 큰 한심함을 보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은인을 배신하는 모습은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연못에서의 구원의 은혜, 성전에서의 말씀의 은혜는 다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안식일 규정 위반에 대한 항의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위반 함정을 벗어나야 하는 시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자신과 동일시했으니 더 심각한 신성모독이라는 혐의가 추가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도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시대에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안식의 의미를 가르져 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부동의 상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실 때 바리새인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일하러 오신 것이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배신할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다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죄의 백신은 사랑이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 죄가 사해지고 안식이 주어집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일만 하다가 죽을까봐서 입니다. 일본에서 일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시고토다카라」라는 말만 하면 통과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죽도록 일하다가 어느 날 어이없이 죽습니다.


일과 돈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부일 수는 있으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일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는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봉사가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보다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없습니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과제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만 살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 무엇이지 고민해야 합니다. 산다는 것에 소중한 가치를 두고 나면 우선 순위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차례로 재편되어질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간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인간적인 날입니다. 저는 항상 회중예배야말로 가장 사람다움의 행위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식 안에 있는 내용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형식이 밉다고 해서 서둘러 형식을 깨어 버려서도 안됩니다.


다른 기회에 안식일과 주일예배에 대해서 더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교회의 주일예배가 유대인의 안식일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만 말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일요일의 주일예배조차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교회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예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어서 매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대인의 안식일도 그 율법의 정신은 제한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90년대에 고베의 한 고등학교에서 기말고사가 있던 날 학생이 지각하여 뛰어 들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문을 닫아버려 학생이 철문에 압사하여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규칙을 지킨다는 것은 중요합니다만 무엇을 위한 규칙입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 따라 우리가 바리새인의 후예인지 그리스도인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