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6:16-21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이다」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6장의 한 가운데를 읽고 있습니다만 아직 이 일곱 번의 에고 에이미 중 그 첫 번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에고 에이미의 시작은 헬라어 성경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저 에고 에이미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물론 히브리어로 쓰여졌지만 헬라어로 옮긴 70인역 성경에는 그것을 에고 에이미로 번역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떨기나무 사이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소개하십니다.


「I AM WHO I AM」입니다.「나는 곧 나」,「나는 나이다」,「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선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증명해 낼 수 있는 도구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 증명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 주신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하는 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나누는데 성경은 특별계시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이 드러나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매일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도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논리로 증명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찾는 자에게는 나타나주시고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이 방향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도 가고자 하는 곳에 가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과 지혜로 하나님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나는 증명할 수 없으나 증거합니다」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계시하시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서 말씀을 받고 그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신격과 인격이 서로 통하는 방법입니다.


「에고 에이미」는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은 일관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하나되심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를 사용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면 요한복음에는 일곱 번의 에고 에이미가 나온다고 하는데 자료가 잘못 계수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잘못 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번 확인해보아도 오늘 본문에서 이미 에고 에이미가 나옵니다. 「내니 두려워말라」여기서 「내니」가 에고 에이미입니다.


일곱 개의 선언을 예고편으로 미리 말씀드리면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생명, 길・진리・생명, 참 포도나무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고 에이미는 헉자들이 일곱 개라고 지정한 것 밖에 있는 것이지만 더 벅찬 기쁨을 가진 에고 에이미라고 생각합니다.


밤 바다에 나가보면 무섭습니다. 깊은 밤에 성난 바다가 배를 흔들어 대면 쪽배에 탄 사람들을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감같은 것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심신이 약해져서 뭐든 헛깨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과 정신이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선언하시는 말씀이 들립니다. 에고 에이미,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테) 내니 두려워 말라. 내가 하나님이니 두려워말아라는 말씀이 들립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로 두려워해야할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로 안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에고 에이미는 어떤 말로 들리십니까? 밤 바다의 풍랑이 삼키려 들기만 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야하는 육체들에게 에고 에이미로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에게도 구원이 있을 줄 알고 붙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에고 에이미가 와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로 걸어 오셔서 이제 두려워말라 하시니 안심하십시오. 다만 물 위를 걷는 것에 대한 과학적 확인이나 증명이 아니라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에고 에이미에 대한 믿음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던 그 기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걸으셨던 것이니 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못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 에이미시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증거할 뿐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과 요한복음을 쓰고 있는 사도요한이 한 것처럼 저도 똑같이 선언할 수 있습니다. 에고 에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로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가 우리의 신앙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