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7:14-124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모세를 알고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모세도 모르고 율법도 몰랐습니다. 어제의 율법은 오늘 오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알려면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안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의무화되고 형식화된 율법주의에서는 그 율법의 의미를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것을 책망하셨다고 말하지만, 책망을 듣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율법과 하나님의 몰이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에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결론을 보십시오. 시기하고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율법 위반으로 고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셨고 그들의 의도를 아시므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하셨던 사건에 대한 율법적 해석을 해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할례의 관습과 율법의 관계를 엮어서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8일이라는 것은 역사를 지내오면서 조상들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생후 8일째 할례를 목숨처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생후 8일째가 되는 날이 안식일일 경우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전날인 7일째나 그다음 날인 9일째에 할례 하지 않고 안식일 당일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할례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유대인들의 논리로는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에 할례라는 일을 하는 것이니 안식 규정을 범하는 것이 되고 할례 후에 성처를 처치를 할 테니 그것은 곧 의료 노동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생후 8일째와 안식일 이 두 가치를 다 지키려면 모순이 일어납니다.

 

할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율법을 어긴 것이니 안식일을 안 지킨 자도 죽여야 하고 8일째에 할례받지 않은 자도 죽여야 합니다. 율법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만 남습니다. 안식과 할례는 죽이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 안식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구별하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할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을 겁니다. 잠시 자기모순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절묘하고 기가 막힌 것이라고 하더라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논리를 부르짖지만, 결코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논리는 논리인데 자기 논리입니다. 자신의 논리적 모순을 인정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고 기분이 나빠져서 적대해 버립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와 너희 자식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고 할례로 인한 몸의 상처를 처치해야 함이 당연하다면 내가 38년간을 고생한 사람의 전신을 온전하게 회복하고 구원과 참 안식을 준 것을 어찌하여 율법을 범했다고 하느냐 어찌해서 그것을 행한 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느냐」입니다. 「거룩하기 위해 할례받는다는 너희들이 어찌 하나님의 구원 노동을 부정하다고 나를 죽이려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항상 이렇습니다. 「너의 생각하는 꼴을 스스로 돌아보고 그 꼴에 문제를 대입해서 넣어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꼴이 무슨 꼴인지 알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객관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버벅거리는 무지는 아직 괜찮습니다. 문제는 단호한 무지입니다. 가장 지독한 무지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신에 대한 무지입니다. 우리는 각각 다른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전통과 문화, 신념과 종교의 안경을 쓰고 그 세계관과 가치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안경으로 모든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질되어져 가고 왜곡되어져 가는 본질을 깨달을 수 있고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 율법을 범했다는 무식하고 난폭한 해석 또는 선동된 가짜 뉴스를 듣고 오직 죽이는 것을 믿음과 신념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식한 열심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아 피를 말려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육체도 일으키셨지만 안 믿으려는 마음의 멱살을 잡아서 억지로 하신 적은 없습니다. 여전히 생각하라고 하시고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인간 예수의 내세울 것 없는 스펙을 알고 그것을 무시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기중심적 논리로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좋은 믿음은 잘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볼품없는 예수님의 행색과 이른바 예수님의 스펙입니다. 예수님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잘 생기지 않았고 외모에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출신이 시골이라 인맥이 없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아 학벌도 없었고 부모가 부자가 아니어서 돈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흙수저입니다.

 

그런 외적 조건으로 보면 예수님은 매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시골 갈릴리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배우지 않았는데 가르침이 훌륭하다고 놀란 것이 아니라 이런 자격 없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허락해도 되는가라는 웅성거림이었습니다.

 

외모는 사람의 일부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결코 전부를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조건은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할 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외적인 것들은 일부지 전부는 아닙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거나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은 훌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머리는 좋은데 마음이 못된 것들 때문에 세상이 망해갑니다.

 

외모라는 말의 또 하나의 의미는 아주 오랫동안 오해되어 온 일반적 이해입니다. 외모에 해당하는 원어를 찾아보니 사람의 얼굴 생김새나 신체 조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형식입니다. 외모를 본다는 것은 속의 본질을 보지 않고 겉만 보는 것입니다.

 

내용을 보지 않고 형태를 보는 사람에게는 전통과 관례가 중요합니다. 사례가 없으면 문제를 파악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사례가 있을 경우에만 그 사례에 따라 일을 합니다. 그래서 폴더 정리는 잘하지만 파일 안에 창조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그 진위를 진지하게 따져 볼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것이 외모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 안식일을 어겼다는 오해되고 고정된 외적 관점 이외에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는 생각에 지배당해서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받은 치유와 회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자 배우 중에 정우성 씨를 좋아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도 외모가 멋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니 학창 시절 때부터 그저 외모를 보고 좋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학창 시절은 순조롭지 못했는지 고등학교를 중퇴했답니다. 사실은 별문제가 아니지만,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지겨운 꼬리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호주에 있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호주 사람들은 학자의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다 고등학교 1학년에 중퇴를 하고 직업으로 나가기 때문에 나라 전체의 평균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랍니다.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계속해야 하지만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정우성 씨는 호주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중졸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얼굴과 키의 외모에 비하면 학벌의 외모는 작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보도를 통해서 그분의 생각이나 행동을 읽을 기회가 있습니다. 난민을 위해서 비난을 감수하고 일하기도 하고 사회의 그늘을 찾아서 그곳에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 살더군요.

 

유수의 대학을 나온 이른바 엘리트라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그 법으로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죽인다면 그 법은 무슨 소용이고 학벌과 출세는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외모를 보고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껍데기를 보고 그것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말과 같지 않겠습니까?

 

조롱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중졸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와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무엘상 16장을 읽어보십시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곧 그 사람의 품고 있는 생각, 사리를 분별하여 본질을 꿰뜷는 진실에 대한 열망,사람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입니다. 신체의 길이와 잘 생기고 못 생기고는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스스로 차별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리(真理)라는 말은 교회에서 많이 사용합니다만 그 비중만큼 사리(事理)라는 표현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원래는 불교용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진리가 참된 도리라면 사리는 사물의 도리입니다. 인간이 사물의 도리와 이치를 내팽개치고 참된 도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추구했는 율법은 참된 도리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리가 없으니 진리를 말하여도 알아들을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셨습니다. 외모와 공의의 수식에 대입해야 할 것을 찾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