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아브라함의 종교적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과 유대교와 그 외 서넛 이상의 종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나의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에 하나님의 선택함의 보증이 있다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혈통의 믿음을 대신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귀신들렸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절대적 자부심이었던 아브라함보다 예수님이 먼저 있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서열을 놓고 경쟁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 밖에 계시는 창조자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예수님의 시대로부터도 2천 년 전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성의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에 들렸다고 하다가 이제는 신성모독으로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짝사랑이 애달프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어 여기서 오셔서 거절당하시고 귀신 취급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아브라함을 지으신 창조주가 아브라함을 존경하는 피조물들에게 침 뱉음과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살해의 위기를 모면해야 했기 때문에 다시 피해서 숨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돌에 맞는 것이 무서워서 숨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라는 것은 역전과 복수의 때가 아니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완성할 시간, 십자가의 때입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보고 기뻐했다는 시제의 맞지 않는 전지적 시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랑을 위한 자기 비움으로 이 땅에 드러나려 하고 있습니다.

 

「케노시스」라는 말은 「비움」을 의미하는 헬라어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을 때 그 비움이 케노시스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그것을 포기하시고 성육신하셨으니 이것이 비움의 케노시스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비우고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는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죽임을 당하시므로 케노시스는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촬영 배경이었던 호주의 울루루는 세상의 배꼽이라는 의미입니다. 호주 사람들은 거기가 중심이라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배꼽이 중심이니까요. 배꼽은 탯줄을 끊은 흔적이지 않습니까? 배꼽을 보면 출생이라는 근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인간들은 그 예수에게서 출생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예수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 우주의 배꼽입니다. 어미는 자신의 탯줄을 끊은 흔적인 아기의 배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영화 제목은 세상의 중심 울루루 즉 우주의 배꼽에서 사랑을 외친답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배꼽에서 탯줄을 제공하신 분으로 그들의 거절에도 불구히고 오늘도 사랑을 외치고 계십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우주의 배꼽이 나옵니다. 제우스가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내면 두 마리 새가 세계를 가로질러 날아가다가 어딘가에서 만나는데 그곳이 세상의 중심 옴파로스입니다. 우주의 배꼽입니다. 조직신학에는 그 이름도 난해한 비하와 승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부터 음부에 내려가시기까지 그 낮아지심이 비하이고 부활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영광을 승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비하로 오신 곳은 탯줄의 흔적, 우주의 배꼽입니다. 그분은 배꼽이 생기기 전에 탯줄을 제공하신 분입니다. 선교에서 비움을 요구하고 그 안에 사랑을 담기를 요구하시기에 예수님의 케노시스의 근거는 충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