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 9:1-12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9: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9: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하나님은 왜 질병과 죽음을 만드신 건가요? 왜 하나님은 많은 아이들이 기근과 학대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거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인데 왜 세상에는 죄가 있는 겁니까? 등등의 질문은 우리 주위에 또는 우리 안에 항상 있었습니다.

 

솔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박할 생각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질문자의 입장은 제삼자이고 태도는 방관입니다. 질병과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고 질병과 죽음이라는 불편한 현상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또한 기근과 학대 속에 있는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실천적인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불공평에 대한 불평을 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자는 어떤 의미로든지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왜 죄를 내버려 두십니까라는 질문 안에는 자신의 죄를 포함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죄의 고민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신의 죄와 타인의 죄를 사회 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아직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보지 않았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쓴 장 지글러는 세계의 식량 총생산량은 전 세계 인구를 먹이고도 남을 양이라는 통계를 제시하고 그런데 왜 기아는 사라지지 않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기아에는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가 있는데 경제적 기아는 천재지변 등으로 생산이 저하 될 경우에 발생하지만, 구조적 기아는 인간에 의해서 어떠한 이유로 식량의 공급이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식량 자본이 가격과 공급을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아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윤리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정치경제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신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는데 인간의 손에서 그것이 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해서「왜 저들은 굶주립니까」라고 항의하지만, 하나님은「왜 나누어 주지 않느냐」고 되묻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글러가 말하는 대책은 왜 굶는 사람들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이것을 극복하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라고 말합니다. 지글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주면 강자에 의한 억압과 착취로 약자는 생존을 박탈당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시장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갑론을박이 있겠지만 자본주의는 정부의 제도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시장체제입니다. 물론 건강한 정부여야 합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시장체제를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이들이 먹어야 하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개입과 제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본을 악마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욕심은 도덕을 앞서기 때문에 사회는 제도적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은 질병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고통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이 기근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자본은 어떻게 제한해야 하고 분배와 노동의 기회는 어떻게 확대해야 합니까?

 

세상은 과연 평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린이를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한 안전장치는 무엇이고 탐욕이라는 죄가 인간에게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제도적 대책은 무엇습니까? 항의할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고민 안에 불러 들어와야 하는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나오고 질문자는 유대의 종교 권력이 아닌 제자들입니다.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기획된 질문이 아니고 그저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시각 장애를 가진 것은 필시 죄로 인함일 텐데 선천성 장애이니 그 원인을 본인의 죄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부모의 죄 때문이라면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다만「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그를 고쳐서 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왜 보지 못합니까」라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나는 왜 볼 수 있습니까」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보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내가 보듯이 그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너는 왜 보지 못하느냐고 이유를 묻고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눈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로 거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어두운 곳에는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경쟁과 생존이 하는 일이 아니고 자비와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빼앗긴 권리를 찾아주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낮처럼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쥐고 있을 때는 줄 수 있으나 때가 지나면 인생도 은사도 시들어 갈 것입니다. 그때는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셨으나 사람들이 빼앗아 버린 먹을 권리와 살 권리, 그 소중한 권리를 찾아주는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에 해바라기의「사랑으로」라는 노래가 금주의 최신가요로 발표되었습니다.「모두가 사랑이에요」,「행복을 주는 사람」,「내 마음의 보석상자」….해바라기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곡을 쓴 이주호 씨는 자신의 노래 속의 사랑은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를 만들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88년도에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는 아이들만 남아있었고 먹을 것이 없었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부모에게 짐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엄마 아빠 짐을 덜어준다고 네 자매가 농약을 먹고 죽으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세 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세 살 난 막내 아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주호 씨가 뉴스에서 이 사연을 듣고 아픈 마음으로 쓴 곡이「사랑으로」입니다. 오늘은 이주호 집사님의 메세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