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 10:1-10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네 번째 에고 에이미는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통해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참 목자이시고 불법적으로 담을 넘어가는 것은 강도입니다. 이 강도라는 말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예수님의 진노가 느껴집니다. 백성을 도구로 여기는 종교 권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이야기를 시대의 교회로 가지고 온다면 성도를 도구로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물론 교회는 성도가 땀 흘려 얻은 수입으로 드리는 소중한 헌금과 시간을 쪼개서 드리는 봉사를 통해서 운영하고 세워져 갑니다. 그것은 분명하지만 드리는 것과 이용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양에게는 변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인가 강도인가라는 변수입니다. 교회를 분별해야 할 때에는 이 관점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성도가 도구인 것은 아닙니다. 교역자에게나 성도에게나 헌신은 자발적이고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억누르는 것이 있고 위협하는 것이 있는 곳은 성도를 도구화하려는 곳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사용했던 삯군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만 삯군의 원래 의미는 결코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일하고 삯을 받아 가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삯군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삯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제사 드릴 때마다 성전권력이라는 도둑들은 머릿수와 그들이 소비하는 종교 비용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타락한 교권은 성도보다 교세에 관심을 두고 예배자보다 그들이 바치는 헌금에 마음을 둡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인지 도적의 소굴인지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전반부에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라고 하시지만 후반부에는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의 문이라는 말에 우리는 목초지가 있고 울타리가 있는 목장을 연상시킵니다. 저도 그런 그림을 그리면서 10장을 읽었습니다만 어쩌면 당시에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떠올리던 이미지와는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양의 문이라는 배경이 한 번 등장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던 그 성문이 양문이었습니다. 스무여 개의 성문중에는 세 가지 동물 이름을 한 문이 있었는데 물고기의 어문이 있고 말의 마문이 있고 또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 북쪽으로 나 있는 양문이었습니다.

 

배경이나 역할에 따라 문의 이름이 다르게 붙여졌는데 양문은 희생제물로 쓰일 짐승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매매하던 장사꾼들이 그 문으로 가축들을 들여왔기 때문에 양문이었습니다. 도둑들은 종교 장사를 하기 위해 짐승들을 반입해서 백성들에게 고가로 되팔았고 병들고 가난하여 그나마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이들은 짐승이 드나들던 그 양문 옆에 모여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제사 드릴 수 없었고 그저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미신적 믿음으로 방치된 채 못가 행각에서 홈리스처럼 진을 치고 살았습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짐승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을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통로가 되어주셨습니다.

 

성경의 짧은 기술에만 의지해서 본다면 은혜를 받은 후의 그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 사건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종교적 거래를 조건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양의 문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