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것을「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하고 그 일들 가운데 사람의 구원과 관련된 계획을「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일방적 선택과 미리 정해진 예정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예정을 다루고 있어서 묵상의 자료가 될만한 신학적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정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정도의 차이는 교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만 예정론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신앙의 입구로 들어갈 수가 없을 텐데 하나님의 예정은 그 주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와「알미니안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체계로 나누어졌습니다. 그것이 칼빈이즘과 알미니즘입니다. 칼빈이즘은 잘 아시는 칼빈을 따르는 것이고 알미니즘은 네델란드 신학자 아르미누스를 따르는 것입니다.

 

두 신학을 대략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칼빈이즘의 인간론은「전적 타락」입니다. 인간은 완전하게 타락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알미니즘의 인간론은「부분적인 타락」이라고 이해합니다. 전적 타락의 칼빈이즘에서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믿음의 계기와 의지조차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스트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알미니스트도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중에 남아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것으로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이즘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무조건적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구원하실 사람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즘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인 것입니다.「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은 누가 언제 어떤 경위로 구원을 받을 것인지를 미리 예지하시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을 사람을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어려워집니다만 피해갈 수 없는 고민입니다. 다시 말하면 칼빈이즘은 절대 예정이고 알미니즘은 예지 예정입니다. 칼빈이즘은 전능에 방점이 있고 알미니즘은 전지에 방점이 있습니다.

 

무조건과 조건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속죄에 있어서는 또 반대입니다. 칼빈이즘은 속죄를 제한적으로 보지만 알미니즘은 속죄가 무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제한적 속죄」라는 말은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고 반면에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즘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알미니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즘에서는 이것을「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하고「성도의 견인」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면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알미니즘에서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초대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서 계십니까? 아마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헷갈리실 겁니다. 그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 안에는 이 두 견해 사이에 절충되고 혼합된 많은 신학적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와 자료들을 통해서 배워왔기 때문에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에 우리들 자신이 이미 혼합적입니다. 사실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학적 개념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절대주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책임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결국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알아서 되돌리실 테니까 떠나도 되지 않겠습니까? 또는 택하지 않았다면 애써도 소용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다 오해인 것입니다. 또한 극단적 알미니스트들은 예정을 부정하다가 하나님의 주권조차 부정하게 되었고 오직 인간의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사실 칼빈이즘은 1618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에서 알미니즘과의 논쟁해서 이긴 적이 있습니다. 칼빈주의가 아르미니안의 주장에 반대하여 세운 5가지 교리가 이미 소개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입니다. 앞글자를 따서 이것을 칼빈주의의 튤립 교리(TULIP)라고 부릅니다.

 

알미니즘은 칼빈이즘에게 지고 개혁주의에서 퇴출되지만 사라지지 않고 영국교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와 개혁주의 전통은 칼빈이즘이고 감리교와 침례교는 알미니즘의 영향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의 설교에서 이것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섞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속한 일본동맹기독교단은 칼빈주의에 속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것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 자체가 정답이 분명하게 떨어져 나오는 산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말은 두 체계 모두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학 안에서는 날을 세우고 싸우지만, 신앙의 현장에서는 어느 한쪽을 극단적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주장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믿음으로 드립니다. 우리는 그것의 상관관계를 완전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어느 것도 모순되지 않고 충돌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용어들이 있어서 지루해 보이지만 우리가 다 한 번씩은 고민했던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믿음을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 그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