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8-44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실 때「달리다굼」이라고 하셨는데 이는「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학교 가야 하는 딸을 깨우듯이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하시니 숨이 멎었던 소녀가 일어나 앉았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부패가 시작된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친구 이름을 부르듯이「나사로야 나오라」(라에자르 쿰 쩨) 고 하시니 나사로가 손발을 베로 묶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시신을 베로 염을 했기 때문에 그 얼굴까지 베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시체를 염습하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시체를 묶어두기 위해서 생긴 장례 문화입니다.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것을 보는 것일 테니까요. 죽음이 확인되면 시체를 결박했습니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어느 문화보다 이 결박이 견고해서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인을 삼베천으로 완전하게 밀봉하여 누에고치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두려움에서 나온 문화일 겁니다.
유대인들도 우리의 장례와 같이 베로 시신을 감아 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장례처럼 단단하게 묶지는 않았는지 나사로는 겨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결박을 풀어주고 걸어 다니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결박은 우리에게는 어떤 형태로 묶여 있습니까? 시체를 꽁꽁 묶은 것은 산 자들은 살아야겠다는 삶의 집착 때문이 아닙니까? 장례식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바쁜 생활 중에 처리해야 할 또 하나의 사회생활일 뿐입니다. 그렇게 파도가 밀려오듯 차례로 사람들은 죽어갑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알면 오히려 힘을 빼고 내려놓을 것 같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는다고 하니 더 힘껏 삶의 부유물들을 부여잡고 집착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부활은 그 집착과 결박을 풀고 자유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자신의 소생 사건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도 영원의 부활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나야 하는 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