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0:1-10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몇 가지 학설과 그것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학은 NO라고 부정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신학으로는 하나님을 증명해내지 못합니다. 인간의 도구로 하나님을 증명해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증명할 수 없으되 오직 믿음과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방법은 논증이 아니고 고백이어야 하고 증명이 아니고 간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신학자의 논증보다 신자의 아직 미숙한 간증이 더 소중합니다.
제가 가진 부활 신앙의 근거가 만약 과학적 증거였다면 새롭게 제시되는 과학적 증거 앞에서 다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과학적 추론이나 역사적 고증으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사망,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아니고는 절벽 앞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절망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이 과학과 역사에 모순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역사 안에서 실재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환원주의적 사고로 증명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갈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허구를 주장하는 말이 저에게 혼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은 많을 테니까요.
부활을 허구로 주장하는 것 중에 유력한 설은 시체도난설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시체를 훔쳐 갔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에 대한 공방을 여기서 다시 인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고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는 누군가 무덤에 들어와 예수님의 시체를 가지고 간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도 시체도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들어가 무덤 안을 확인합니다. 제자들도 근심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만 그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이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마치 탐정처럼 현장을 스케치했습니다. 세마포와 수건에 대한 상태에 집중합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남아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말끔이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도굴범이 수건과 세마포를 풀었을 리 없고 그것이 각각 다른 곳에 차분히 개어져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마포와 머리수건을 따라가 보면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가신 예수님의 동선이 클로즈업됩니다.
독자들의 의심의 여지를 알고 부활의 증거를 기록하려 했던 요한의 친절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