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21:15-25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세 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헌신적이고 무조건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이고 또 하나는 친구의 우정을 말하는 필레오이고 나머지 하나는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그중에 두 번을 아가페로 질문했지만,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필레오로 질문을 했고 베드로는 변함없이 마지막도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헬라어는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원문상의 단어 선택의 차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용된 코이네 헬라어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의 의미상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때로는 탐욕스러운 성적 욕망을 표현할 때도 아가페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헬라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람어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헬라어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유사 동의어가 혼재되어 사용된 것뿐입니다. 

 

당연히 아람어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와 구분은 없었기 때문에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헌신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원어상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대화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또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문제보다 더 궁극적인 대상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가 지켜 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내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로 묻고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나에게 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요구되어야 할 텐데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즉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내 양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에 비하면 인격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양을 사랑하는 일상을 통해서 증명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가페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여기 있는 형제를 필레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곧 아가페입니다.

 

영화「쿼바디스」에 나오는 베드로의 순교 이야기는 외경 베드로 행전의 내용을 따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로마 교회의 권면에 따라 네로의 박해로부터 몸을 피하기로 합니다.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 아피아 가도를 걷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운 예수님이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로 가신다고 했습니다. 로마에 내 양들이 있으니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고 하십니다. 

 

깨달은 베드로는 뒤돌아 다시 로마의 형제들에게로 돌아갔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이 죄송하다 하여 자청해서 머리를 아래로 두고 거꾸로 매달려서 역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나 베드로나 그 죽음의 결정적 이유는 양을 사랑해서입니다.

 

아동학대의 절대적 가해자는 항상 부모이고 그다음이 대리 양육자 또는 친척이라고 합니다. 결국 학대는 믿을 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아이를 맡기면 되겠습니까?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리 양육자가 부모한테 하는 것은 진심일 수도 있고 혹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때 아이에게 하는 것은 다 진심일 테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요한복음 큐티는 사랑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끝났습니다. 

 

큐티가 정해주는 본문이 길어서 몇 계단씩 건너뛰기로 읽은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삶으로 일독하는데 10년 정도가 걸린답니다. 말씀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실천해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학개를 읽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vWW8FRW4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