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9장 11~24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9:18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9: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 하겠느냐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9:22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9:23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9: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이데거는 인간을「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내던져져서 새파랗게 질려서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것을 「피투성」이라고 합니다. 「피투성이」가 아니고 세상으로 내던져졌다는 의미로「피투성(被投性)」의 존재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다시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사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는「인간이 불안과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리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언어유희입니다만, 에스겔에 보면 「피투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16:6」 소망 없이 버려진 핏덩어리 여자아이에게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버림받은 핏덩어리를 살리시고 씻기시고 세상 가운데 높이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살라」는 것입니다.

 

욥은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현실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욥에게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 안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욥은 삶을 놓고 싶지만 살아야 합니다. 피범벅이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야 합니다. 욥을 포함해서 모든 절망 중에 있는 피투성이(血まみれ) 들, 또는 피투(被投)의 존재들에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에스겔의 말씀으로 응원합니다.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F0gt05ri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