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장 12~20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11:15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1: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1: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1:18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11: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11:20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 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
소발이 엄격한 신앙을 가진 원칙주의자라서 욥에게 이런 독설의 조언을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아마도 그는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욥이 부유하고 힘 있을 때에는 이토록 단호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발이 욥에게 말하기를 「허망한 사람이라 지각이 없는 들나귀 새끼같다」고 합니다. 「들나귀 새끼」라고 말한 것은 멍청하고 고집이 세다는 말입니다. 들나귀라는 것은 집나귀와 달리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나귀를 말합니다. 게다가 새끼이니 사람이나 짐을 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날뛸 것이 분명합니다. 나귀 입장에서는 자기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을 강요하니 저항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 입장에서는 들나귀 새끼라는 것이 곧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말 안 듣고 시키는 대로 안하고 체제와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들나귀 새끼입니다.
욥에게 들나귀 새끼라고 한 것을 보니 소발은 욥을 밟아도 될 것 같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의 말들이 무색해집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약한 자에게 하는 것을 보면 가장 강한 하나님에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마태25:40」
소발이 회개하면 좋아진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발은 회개라는 지렛대 하나만 있으면 저주와 축복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회개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믿음으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그리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믿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 가난한 자를 건져내고 아픈 자를 위로하고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신앙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발 자신은 축복 속에 있으므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의 영역에 있다고 착각하는 고차원적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큰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입바른 말을 하다 보면 자신이 실제로 그런 줄로 착각합니다. 믿으라는 말을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자신이 정말 잘 믿는 줄 압니다. 그것이 목사의 위험한 함정입니다. 많은 것을 확신적으로 알고 있는 소발과 같은 목사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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