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16장 18~17장 5
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16:22 수 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17: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17: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 하시리이다
17:5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는 말은 욥이 자신의 억울함을 사무치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욥은 기진맥진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도 신앙적인 혼란이 섞여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지만 우회적으로 상황을 원망했습니다. 아무도 욥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 고독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참 무서운 고통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고… 물론 맞는 말입니다만, 말 잘하는 욥의 친구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입니다. 외로움이 사람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사람이 채워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몸을 가지고 사는 지상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큰 믿음이라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간과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령 고독이 하나님의 의지하게 하는 기능이 있을지라도 고둑에 방치한 이웃이 선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욥이 말했듯이 지금은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친구들의 정죄가 더 큰 재앙이 되어 욥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욥이 사무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친구들에게 당하는 서러움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서 왜 소모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가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가만히 금식기도라도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정죄하고 있는 친구들이라도 옆에 있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대화할 사람조차 없는 외로움은 무서운 고통이니까요. 욥기가 고통 가운데 던져진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큰 비중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이 무너지고 약해지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은 욥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렇다고, 늙어서 그렇다고,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동경에는 일 년에 천 명의 노인이 집에서 혼자 고독사합니다. 약해진 육체로 대화할 사람 없이 고독하게 살다가 굶어 죽습니다.

 

왜 늙었는지 왜 외로웠는지 왜 가난했는지 따져 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죽어가는 욥은 우리 지천에 널렸습니다. 욥에게 하나님만 바랄 수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받는 위로의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욥들에게 그 이유를 묻지 말고 위로를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9sDsMLEy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