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5장 1~6
25: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5:2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25:3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25:5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25:6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이사야 41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버러지」라고 했습니다. 개정개역은 버러지를 「지렁이」로 번역했습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이사야 41:14」 야곱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곧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편 22편에서도 다윗이 자신을 벌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편 22:6」 오늘 본문의 빌닷의 표현에서도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선 죄 많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깨달을 때 벌레와 구더기라는 표현도 못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고백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 대한 것이라면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은 비하이고 멸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빌닷도 여느 친구의 말처럼 미사여구를 청산유수로 말하고 있지만, 뇌를 거치지 않고 마음을 통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말입니다. 욥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동원된 표현은 욥의 인격(6)과 욥의 부모(4)와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세계(5)까지도 죄악된 하찮은 것으로 폄훼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신다고 했지만 누가복음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2:14)라고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먹는 것과 외로운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과 아픈 사람이 이 땅에서 나음을 받는 것이 평화입니다.
벌레 구더기라는 것은 하나님이 무흠하여 거룩하신데 인간은 그에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부패했다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더 인정해야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벌레라고 표현되는 비참한 상태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무시와 멸시를 대신 당하면서 인간의 화평을 회복하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지렁이 같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시편에서 벌레 같은 다윗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은 학대나 자학이 아니라 도움의 요청이고 그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지렁이라고 말한 것은 도움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본 사람이 사람을 용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닷이 자신만의 은밀한 기도에서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벌레라면 벌레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빌닷은 자신의 믿음의 이름으로 칼을 들고 일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찌르고 멸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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