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3장 1~10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3:2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3: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3: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3: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3: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3: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3:9 그 밤에 새벽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잠시의 침묵 후 3장에서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생명의 축복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너무 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원망하지 않지만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시를 통해서 이겨내기 힘든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 상실과 고통을 당하고 혼란스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기계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이상을 논할 때라도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서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강할지라도 그것은 약한 인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슬픔을 이겨내더라도 울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상처가 회복되더라도 아파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그런 다음에 맺히는 결정체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욥이 기계적인 모범답안을 말하지 않고 주저앉아 울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습니다. 욥이 특별한 자리에 있지 않고 우리와 같은 자리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은 위로입니다. 욥에게 동요함이 없었다면 욥기는 고난받는 인간을 위한 텍스트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욥의 고난이나 그에 대처하는 욥의 신앙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위로입니다.

 

고통이라는 현실은 믿음이라는 이상과 비교하여 비관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육체와의 상관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그쳐서 되는 믿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힘내라고 다그친다고 힘이 나지 않습니다. 울지 말라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약한 육체는 고통을 이겨낼 시간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욥의 절망스러운 자조의 시는 믿음으로 가는 서문입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BSwDVL62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