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36장 1~15
36: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36:2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36: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 보내리라
36:4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36:5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이 무궁하사
36:6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36:7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36:8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36:9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36:11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36:12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36:13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36:14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36: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악은 하나님의 의해서 망하고 하나님이 기어이 선을 높이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생명과 질서를 만드셨고 그분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고 그것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경고되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해지는 것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분명히 선이 이기고 악이 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고 계시는 오늘의 현실에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샌델은『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각자 개인의 가치관이 정의와 관련되어 있어서 그것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신념이 정의가 되어 자신의 정의 안에서 타인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고 일그러진 자기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선을 행하지만 불행하고 어떤 이는 악을 행하지만 행복해 보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죄라고 한다면 형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이유를 선이라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선과 악, 믿음과 불신앙,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 세상에서 자주 혼란스러워합니다.

 

불의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가고 또는 선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보아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과정일 뿐 결과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엘리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정죄라는 결과가 아닌 훈련이라는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고난이라는 실제, 그 과정이 주는 긍정적 의미에 대해서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을 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엘리후의 욥에 대한 판단력은 부족했지만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한 통찰은 세 친구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싶지 않고 행복한 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는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돌아보니 믿음에 붙어있는 것이 어려움과 실패를 지나오면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약하고 마음이 욕심스러울 뿐이지 고통은 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93_hkkbK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