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12~21
4: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4: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4: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4: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4: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4:20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4:21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속이는 말이 명확하게 분리되어지는 기름과 물 같은 것이라면 해석과 분별력이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사탄은 우리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의심하지 못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호소에는 웅변력이 있습니다. 감히 반박할 수 없습니다. 늘 든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색깔이 입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체 없이 관념적으로 쓰는 종교적 언어, 감히 반박할 수 없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하지도 못하고 공중에 떠 있는 언어들, 그것를 버리고 자신의 일상의 언어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언어는 엄숙합니다.「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17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19,20」
누가 이것을 반박하겠습니까? 전도서에 들어 있다면 이상할 것 없는 인간론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 앞에서 인간의 지위를 올리겠습니까? 엘리바스는 이런 말로 욥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의 핵심은 욥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하나님이 고문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이 어찌 틀린 말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엘리바스의 회개의 촉구는 욥을 더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회개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했으니 복을 받고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 보응신학은 욥기에서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긴장 가운데 등장했던 사탄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욥을 박살 내놓고 이제 무대에서 사라진 것입니까? 사탄은 욥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직 사탄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사탄이 엘리바스의 가면을 쓰고 욥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보고 듣고 떨었다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고 어리석은 인간을 속이는 사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모든 것에는 항상 위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같이 확신에 찬 웅변이거나 정죄의 칼이 숨어있는 말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읽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악이 아니라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소견입니다. 기어이 죽고 죽이게 하는 것이 선과 악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의 충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에 나의 무지와 위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며 내 생각대로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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