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누가복음 2:25~38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2: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시대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박제화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활력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구원받았음을 이야기하지만 구원이라는 말뜻을 생각할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의 전제는 예외 없이 도망갈 여지가 없는 멸망이어야 합니다. 멸망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감정이 그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겠지만 상투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말이 닳아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받았다 구원받지 못했다 등의 언어 사용이 밖에서 보기에는 생명력 없이 박제된 짐승의 괴기한 눈동자같이 보입니다. 박제가 살아있다면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며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애타게 구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기다림에 지친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도움 또는 행운 정도의 말이 될 것입니다. 구원 앞에서는 자존심이나 자신감 같은 감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태여야 합니다. 몸과 목숨이 끊어지는 상태입니다. 구원 직전의 상태는 외부로부터의 구원이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위기와 절망의 상태입니다.

 

구원은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구원의 활동을 실행해야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감사 말고는 어떠한 조건도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 시간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때가 아니라 그 후에 한참 더 시간이 지난 어떤 시점일 것입니다. 복음을 머리로 알고 있다가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시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는 말은 인간의 절망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 절망은 행동의 실수나 악행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 존재가 전적 타락하여 소망이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때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구원해 낼 수 없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함께 해온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는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했으나 시므온과 안나가 기다린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봤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대제사장이라는 종교에 의해 고발당하고 로마라는 정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그들은 절망을 알았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하거나 독립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적 절망을 알았던 것입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가 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대속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시므온이 말한 「주의 구원을 보았다」와 38절에서 안나가 말한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다」는 죄에서 구원하실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속하셔야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꼭 하나, 단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면 그분이 나를 위해 대속하신 사실입니다.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절망적인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오직 나의 구원의 근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