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8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창조, 성육신, 십자가, 부활은 모두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재림도 직접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피조세계에 일원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을 신적 권능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전하셨고 그것을 듣고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개입하지 않고 남겨둔 영역은 믿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믿음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역할은 그것뿐입니다.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려면 먼저 자신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라는 자기 정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자신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스스로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 명료하고 적나라한 인식에만 가 닿아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3 유대인의 구원관은 해체되고 구원의 대상은 재편됩니다. 구원은 유대인 혈통에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소속도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라는 오래된 논의는 단순 이분법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시면 인간이 응답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 즉 예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정을 측량할 수 없으니 믿음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예정 속의 하나가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신앙 의지를 설명했습니다. 지정의를 사용하여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12)가 곧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13)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