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6~44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나흘이 지난 후에 장례식에 도착했습니다.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생명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에게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찍 오셨으면 살려주셨을 텐데 왜 늦게 오셨냐고 원망 섞인 넋두리를 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슬픔에는 제한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에는 제한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부패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던 나사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간에 도착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나사로의 집에 가지 않으시려는 계획으로 나사로가 위급할 때 서둘러 가시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간을 통제하고 계신 것은 믿음에 있어서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만 할 필수전공 수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치고 죽어가는 병자를 살리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과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이 죽음을 이긴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삶이 연장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경우는 시체가 부패한 후에 다시 살아난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에 다가가기 전에 죽음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명백했던 죽음을 제압하고 부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 2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죽음의 너머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죄를 사하고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없다면, 믿음은 그저 현실적인 도움을 구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분주한 월요일 아침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