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1~38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옛 계명은 조문으로 된 율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의 조항을 모두 지키려고 하는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요구입니다.
이 말씀은 어렵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해 본 사람, 또는 형제를 사랑하려고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둘 다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곧 사랑이라면 사랑의 실천은 율법보다 더 어려운 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정해진 것을 지키는 방식, 즉 율법주의적 신앙에서 자신의 신앙을 인식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지킬 실력이 없는데 끝없이 지켜야 하는 율법, 그것과 마찬가지로 실력이 없는데 끝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어디까지 사랑하면 이 사랑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끌어당겨 많은 것을 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밀어내지만 않고 받아들여 주는 것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난하고 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실제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분란은 더 잘해주지 않는 문제가 아니고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면 그것이 곧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