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7:10~20
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77: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77: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77:14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77: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 (셀라)
77: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77: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77:18 훼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77:20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본문은 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내면 고백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시인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내려 한다. 그것은 옛날이 좋았다는 감상적 넋두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소망하려는 신앙적 서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기억의 영성, 돌아봄을 통한 신학적 해석이라는 가슴 설레는 주제를 만난다. 진흙 속에 묻혀 있었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 안에서 빛나는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꺼내어 곱게 닦아내는 것 같은 설레임이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하신 기이한 일들, 구속하신 일들, 바다를 가르셨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시인은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며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날 홍해 바다를 건넜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뿐이었고, 금방 배고파졌고 목마르니 짜증을 내며 발을 굴렸다. 그때는 몰랐다. 물 마셔서 좋았고 만나 먹어서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과연 그 바다 안에는 길이 있었고, 그 바닷길을 하나님이 함께 걸어가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억은 신앙을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해석해 내는 도구이다. 세상의 진흙탕물에 내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성도는 자신 안의 진주를 찾아 그것으로 행복해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고상한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나의 중요한 길목에서 만났던 나의 하나님을 간증할 때마다 눈물을 잘 참지 못한다. 매번 눈에 힘을 주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만,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눈물이 고이고, 무엇이 서러웠는지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인다. 간증을 많이 말했다고 해서 점점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것으로 말하면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진주가 더욱 영롱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다지고 다듬는 과정이다. 출애굽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인의 역사 인식도 연대기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내는 해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교육에 ‘평가’의 과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본래 모든 교육은 반드시 교육에 대한 평가를 한다. 레포트를 내고, 시험을 치고, 발표를 하고, 논문을 쓴다. 그것에 통과해야 교육을 이수할 수 있다. 엉터리 교육일수록 평가를 생략한다. 그런데 교회 신앙 교육에는 평가가 없다. 그래서 긴 세월을 읽고 듣지만 쓰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 자기 언어로 말하지 않고, 글로 정리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은 구조화되지 않는다. 성경 공부에 참가하고 전도자, 리더십 훈련을 받지만, 그것이 자기 언어로 정리되지 않으니 소화한 것이 없다. 그것은 아직 이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반드시 레포트를 내게 하고, 시험을 치게 하고, 발표를 하게 하고, 토론하게 하고, 논문을 제출하게 한다. 그 의미를 말하고 써 보지 않으면,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쓰기 때문에 성장하는데, 성도들은 쓰지 않으니 무엇을 믿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평생 기도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조리 있게 기도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타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영성이 없거나 말주변이 없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기도를 글로 써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기도를 녹음해서 편집해 보면, 필요 없는 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콕 집어서 하지 말라고 하셨던 중언부언이다. 정해진 신앙고백을 복창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성도가 걸어 온 삶에 하나님의 흔적은 넘쳐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한 간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믿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간증이 없는 것이 아니고, 돌아보아 기억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고, 기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을 해석하지 않고 사건의 의미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의 혼란을 글로 기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한 인생’이라는 구조가 남아 있지 않다. 기도회에 참석해서 감정에 휩싸여 기도하기보다, 각자가 쓴 기도문을 낭독하고 나누는 연습이 더 깊은 신앙적 밀도를 낳을 수 있다고 믿는다. 듣기보다 말하기, 읽기보다 쓰기가 더 중요하다. 아웃풋하지 않으면 인풋을 유지할 수 없다. 기록하는 역사 인식을 가진 모세를 통해 모세오경이 주어졌고, 기록하는 바울이 있었기에 신약의 대부분이 주어졌다. 기록하지 않은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지워 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