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8~25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백세 된 몸과 사라의 죽은 태라는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되,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에게도 분명히 인간적인 흔들림은 존재했다. 그것이 결점일까? 신앙도 인생도 흔들리지 않고 저절로 서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흔들림 가운데서도 결국 하나님을 붙드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 갈 곳, 마음 둘 곳은 거기 밖에 없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끈질긴 희망이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도 위함이니” 롬 4:23–24.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한 인물의 영웅적인 사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방식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믿음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사적으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믿음의 원형이며, 동일한 본질의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지금도 동일한 복이 전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동질이 되는가?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은 법적이고 존재론적인 결정이다.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에게 의가 전가된 것처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의가 전가된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고 했다. 모리아산에서는 이삭의 죽음 직전에 멈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과 죽음은 참혹한 실제였다. 예수님은 죽었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위하여 있는 말씀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하여 장차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감당한 순종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 믿음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메시아를 향한 그림자였고, 우리의 믿음은 그 메시아를 믿는 구체적인 고백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과거의 모범을 따라가지 못해 자괴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 삶 속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현실로 누려야 할 복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의 믿음의 계보 안에 속한 사람이다. 이 믿음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무게 있게 여기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며, 오늘 예수를 믿는 자가 누리는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