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4~29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8장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확신했지만, 이어지는 9장에서는 또 다른 긴장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왜 이토록 복음을 거부하는가”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잘라 말한다.
불의는 오해한 인간에게 있다. 구원의 결정은 민족이나 종교의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유대의 선민의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바깥에 있는 어떤 절대적인 자격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유대는 자신들의 종교성의 능력을 오해했고, 교만으로 치우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은혜와 긍휼이라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구원의 결정이 하나님의 선택에만 있는가, 또는 인간의 믿음의 의지에도 있는가 라는 이른바 예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을 반복해 왔다. 칼빈주의는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을 강조했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보편적 은혜와 조건적 선택을 주장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 함께 존재한다. 우리는 이 본문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로마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은 예정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대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 주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은 유대인을 향한 배타적 특권이 아니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처럼, 또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는 호세아의 말씀처럼, 모든 비유대인 다수에게까지 인류보편적 구원의 도구로 복음이 확장되는 것이다.
바울은 민족주의와 종교적, 집단적 특권의식을 해체하면서 로마교회에 대하여 복음적 시야를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유대를 타고 왔지만, 유대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도 종교를 타고 왔겠지만, 종교의 집단성을 극복해야만 복음의 본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는 고독한 자기 실존과 마주 해야 하고, 거기서 복음을 만나야 한다. 군중의 종교성에 묻힌 자기확신을 내려놓고, 인격적인 복음을 만나야 한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지음 받은 자가 창조주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어떤 항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앎의 문제가 아니고 깨달음의 문제이다. 구원을 깨달은 인간은 그 은혜의 신비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음받음’, ‘선택받음’, ‘구원받음’의 신앙의 길 위에 서 있다. 그것은 결코 믿음이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말과 자랑은 줄이고 ‘부름받음의 응답’과 ‘쓰임받음의 열정’이라는 적극적 수동태로 살아야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