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9:1~15
9:1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9: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
9: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9: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9: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9:7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약조할 수 있으랴
9: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
9: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9:10 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9: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거민이 우리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맞아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청컨대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하라 하였나이다
9: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9: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무너지자 남은 가나안 부족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로 결의했지만, 기브온만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속이면서 이스라엘의 종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야 진멸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기브온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기브온 입장에사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지 부족을 종으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4” 라는 말로 이 사건의 본질을 전한다. 그들의 판단과 선택에 잘못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물어보아야 했던 것일까? 기브온을 종으로 삼을까요, 거절할까요, 를 물어야 했던 것일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결정해야만 한다는 말씀일까?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상위 명령이 있지 않았는가. 그 명령은 속성상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명령이다.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족속 중에 누군가를 종으로 삼는 것도, 그들과 공존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을 왜 진멸해야만 했는가는 질문은 오늘 주제가 아니지만, 불순한 것의 영향력을 완전하게 배제한 새로운 것으로의 거듭남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빼먹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나름 신중했고, 고민했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서 합리적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문제는 그 합리성이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그것을 기준 삼지 않고, 상황에 따라 합리적 판단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상위 명령을 임의로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합리성은 곧 타협이 되고 불순종이 된다. 문제는 자비가 아니라, 명령을 자기 기준에 맞게 재해석한 데 있었다. 성경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임을 엄하게 경고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가시는 방향을 이미 알고 있는데, 상황의 합리성에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방향을 거스르는 것, 타협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 된다. 기도라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기 방향의 설정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