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9:16~27
9:16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
9:17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9:18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9:19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9:20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9:21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
9: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9: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9:25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9:26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9:27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속여 언약을 맺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 그들을 멸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이상 그것을 파기할 수 없었고 결국 기브온 사람들을 살려주되 이스라엘의 종이 되게 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윤리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 진지함과 엄숙함은 지금도 배워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앙이 규칙 준수가 아니라 계시의 원칙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분별의 문제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사사 입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딸을 인신제사로 드렸고, 사울도 자신이 무모하게 맹세한 것 때문에 아들 요나단은 죽이려 했다. 무지에서 비롯된 맹세조차도 무조건적 구속력을 갖는다면, 책임은 어디까지 인간의 몫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체적 설명이 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그 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반드시 해석과 선택을 거쳐야만 한다. 신앙이란 계시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추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에 뿌리내린 사람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적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가나안을 반드시 진멸해야 한다는 딜레마에서 이스라엘은 맹세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윤리적으로는 책임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한 번,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선택으로 실패했지 않았던가. 이 문제야말로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계시는 다시 인간의 해석을 통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 우선인가, 무엇인 전제이고, 상위인가를 해석하고 분별해 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간 안에 말씀이 켜켜이 쌓여야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