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7:1~13
17:1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 이러하니라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이었고 므낫세의 장자 마길은 길르앗의 아비라 그는 무사이어서 길르앗과 바산을 얻었으므로
17:2 므낫세의 남은 자손을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그들은 곧 아비에셀의 자손과 헬렉의 자손과 아스리엘의 자손과 세겜의 자손과 헤벨의 자손과 스미다의 자손이니 그들의 가족대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남 자손이며
17:3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 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17: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방백들 앞에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 하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기업을 그 아비 형제 중에서 주므로
17:5 요단 동편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으니
17:6 므낫세의 여손들이 그 남 자손 중에서 기업을 얻은 까닭이었으며 길르앗 땅은 므낫세의 남은 자손에게 속하였더라
17:7 므낫세의 경계는 아셀에서부터 세겜 앞 믹므닷에 미치고 우편으로 가서 엔답부아 거민의 땅에 이르나니
17:8 답부아 땅은 므낫세에게 속하였으되 므낫세 경계에 있는 답부아 읍은 에브라임 자손에게 속하였으며
17:9 또 경계가 가나 시내로 내려가서 그 시내 남편에 이르나니 므낫세의 성읍 중에 이 성읍들은 에브라임에게 속하였으며 므낫세의 경계는 그 시내 북편이요 그 끝은 바다며
17:10 그 남편은 에브라임에 속하였고 북편은 므낫세에 속하였고 바다가 그 경계가 되었으며 그들의 땅의 북은 아셀에 미쳤고 동은 잇사갈에 미쳤으며
17:11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 곧 벧 스안과 그 향리와 이블르암과 그 향리와 돌의 거민과 그 향리요 또 엔돌 거민과 그 향리와 다아낙 거민과 그 향리와 므깃도 거민과 그 향리들 세 높은 곳이라
17: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17: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정복 후 토지 분배에 따라 지역 경계가 만들어지고, 경제 구조와 생활 방식은 변화하게 될 것이다. 세대는 광야 세대에서 가나안 정착 세대로 넘어갈 것이고, 가나안의 왕정과 도시 국가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언약 공동체라는 새로운 정치적·종교적 질서가 세워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역과 세대, 인종과 성별, 정치, 경제, 종교의 권력 구조가 다 뒤집히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완전한 진멸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타민족과의 공존이라는 현실이 시작될 것이고, 그 혼합의 현실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기에 우리는 정착 이후의 이스라엘의 삶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그런 변화 속에서 여성에게도 상속과 가문의 명의가 주어지는 획기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야기는 민수기 27장에서 시작된다. 므낫세 지파의 슬로브핫은 아들 없이 죽었고, 다섯 명의 딸이 남았다. 당시의 상속은 아들이 없는 경우, 그 집안의 이름과 재산은 공동체로 귀속되고 사라지게 된다. 딸들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이름이 지워지고 자신들이 상속에서 제외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모세와 공동체에게 진정을 냈다.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셨고, 그것은 아들이 없는 경우에 딸이 상속받고 가문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제도의 개편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특례가 아니라, 시대가 진보한 결과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공동체의 질서를 수정하신 질서 재구성의 결과였다. 되고 안 되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분명히 이전 것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이전 것이라고 해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어제 본문을 통해서 분리해야 하는 것과 공존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오늘은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전례와 전통은 수정하고 발전시킬 때 그 의미와 역할이 더욱 빛날 것이다.
여권 신장과 소자화로 한국 사회의 족보는 이미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여성의 직업적 제한은 거의 사라졌지만 많은 교회는 아직도 여자는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젊은이와 여성은 교회와 교계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수천 년 전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에게 진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 한국 교단의 총회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에 대해서 곤란하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하려면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더 깊고 넓게 읽은 후에 말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아프다. 갑자기 아프게 된 것도 아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의 기도」의 한 부분을 생각한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