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3~29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본문에는 이방인도, 무신론자도, 악한 인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한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길을 걷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예언하는 사람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다 종교적 언어와 행위에 익숙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그래서 믿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종교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적 언어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말씀이다.
넓은 길은 종교와 구분한 세상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넓은 길이란 오히려 종교가 잘 작동하는 길을 말한다. 이미 닦여 있고, 익숙하며, 설명할 필요가 없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없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굳이 결단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현재 자신의 삶을 해체하지 않아도 된다. 기존의 종교라는 시스템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 신앙과 헌신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내려놓지 않아도 되는 길이기에 넓다.
반대로 좁은 길은 종교적 난이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길이기에 좁은 길이다. 이 길을 방해하는 것은 길의 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자기 덩치와 짐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는 갈 수 없다. 좁은 길을 가려는 사람은 자기를 깍아내고 계속해서 버리며 가야 한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경고하시지만,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이른바 정통 교리인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것, 판단하지 말 것, 정죄하지 말 것, 자기 들보를 먼저 볼 것,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행할 것을 기억하는 동안에 하신 말씀이다. 열매란 이 흐름과 분리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차이는 가르치고 인용하는 내용의 정통성, 소속교단이나 출신신학교가 아니라, 사람을 모아 가르치려는 동기에 있다. 건강한 공동체라면, 그 열매를 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주여 주여”라고 하나님을 부르지만 예수님은 그것도 지적하신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그 횟수와 볼륨은 하나님 앞에 서는 진실함과 깊이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호명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조율하는 자리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언어는 친밀함이 아니라 가면이 된다. 그럴 경우 예수님의 반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이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알고 모르고의 문제이다. 윤리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의 문제다. 관계가 없는데 윤리와 열심이 그 위에 세워질 리가 없다.
예언도, 능력도, 기적도 그것은 다 현상이었다. 그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계시하셨고 지금도 계시하시지만 인간을 끝없이 다른 계시를 찾아다닌다. 그것이 곧 하나님인줄 알고 따라나녔다. 말씀 앞에 진지하지 않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에 하나님을 부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마지막 비유에서 무너진 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없었던 집이 아니다. 분명히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고, 알고 있었던 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구조가 되지 않았다. 말씀은 있었지만, 그것을 재료로 해서 인생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열매가 드러난다. 열매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의 완전한 구조 안에서만 열매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없어도 종교는 크고 화려하며 잘 굴러간다. 그것을 기준삼으면 좀비가 된다. 나를 깎고, 주위를 살피며 긴장하여 좁은 길을 걷고, 자기 동기를 검열하고, 종교적 형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나와야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하나님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내 주어진 시간 안에 믿음이라는 것을 세워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