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성경에 관심을 가진 한 유학생과 만났다. 내가 유학생이었던 시절에 전도자들에게 거칠었던 것에 비하면 그 청년은 교양 있고 훌륭했다. 잘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즐겁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청년은 약간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성경공부에 참가하기로 했지만 그 이후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거나 실례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는 대로, 그리고 믿는 대로 대답했다. 「백 명을 전도하면 한 명이 교회에 오고, 백 명이 교회오면 한 명 정도가 믿음을 가집니다. 사람이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고 싶지 않다고 해서 믿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제대로 전달하고 못 하고의 문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청년은 경우가 바르고 이른바 염치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호의에 대해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조심성을 가지고 있었고, 점심시간에 찾아온 것만으로 미안해하는 청년은 염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메이와쿠 카케나이 타입이다.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죄는 자신이 지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래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 십자가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는 염치는 없고 넉살만 좋은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 염치와 넉살이란 말은 여기서 적절한 말은 아니다. 사람은 염치를 알고 살아야 한다. 값없이 받는 구원의 은혜와 모든 것에 책임이 따르는 사회적 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 하나는 구원은 죄인이 염치불고하고 받는 은혜라는 것이다. 염치불고(廉恥不顧)는 염치(不顧)를 돌아보지 않는다(不顧)는 말이다. 자격이 없지만 담대하게 받는 것이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구원은 염치로 사양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말씀만 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겠습니다.」 우리는 염치불고하고 그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 형제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