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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성경에는 「의(義)」가 많이 나오는데 의(義)는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한 것은 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증」,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기 위한 열망」이 곧 「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본 적이 있는가? 그 해갈의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팔복의 6절에 나온 「의(義)」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수네 (δικαιοσυνη)」 이지만, 히브리어로 옮긴다면 「체다카 (צדקה)」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 세계에서 체다카를 「기부」라는 말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자선」이라는 의미의 영어 「찰리티 (Charity)」는 「사랑」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에서 왔으니 체다카와는 관련이 없다. 유대인들은 「기부」라는 의미를 말할 때,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자비라는 의미의 「헤세드 (חֶ֫סֶד)」가 있지만, 유대인의 기부는 헤세드가 아니고 체다카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체다카」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선이 아니고 올바름이고 정의이고 공정인 것이다.

 

미국 인구 중에 약 2%가 유대인이지만, 미국 전체 기부액의 30%를 유대인이 낸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기부하는 것은 유대주의에서는 철칙이다. 이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우상숭배와 같이 여긴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의 기본권을 지켜야 한다는 천부인권적 가치이고, 또 하나는 아직도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이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유대인들의 배부름, 즉 탁월함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체다카를 실천했던 결과가 아닐까.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면 더 풍성해지는 체다카의 가을을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