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강해 시간에 바울은 자신을 고소하던 유대인들이 더 이상 반론할 수 없도록 자신의 무죄를 완벽하게 변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율법의 교리로 유대인들을 이겼고, 로마법정에서는 로마법의 법리로 통쾌하게 이겼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는「진실을 말하는 이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바울의 시대에 비해 2000년이 지난 현대의 일본과 한국에서는 교육이 국민의 의무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을 통해 다양한 교양과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양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 그리고 양심과 항상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을 이용하여 오히려 거짓을 말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도구로 쓰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지식은 진실과 양심이 함께 할 때만 시대의 지성이 되어서 선과 믿음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은 바울을 재판하고 있던 유대 총독 벨릭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가 재판정에 앉아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 한발 다가선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행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벨릭스 총독 부부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도를 들었다고 합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아내가 유대인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벨릭스의 유대인 아내가 남편에게 바울에게 복음을 들어볼 것을 권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 드루실라라는 여인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순교한 사도가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이지요. 그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1세의 막내 딸이 드루살라입니다. 그러니 헤롯 아그립바2세의 누나이기도 하지요. 왕가에서 태어나 왕가와 결혼하고 또 이혼을 반복하며 권력을 탐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또 이 여인은 당대 절세의 미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남편 벨릭스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벨릭스는 원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지요. 벨릭스는 출세를 위해 몇 번의 이혼을 했고 그리고 기어이 왕가의 공주 드루실라를 아내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 부부 앞에서 했던 바울의 설교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본문은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권력자 벨릭스에게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한국에 국가조찬기도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위상을 드러내고 교계가 대통령을 초대하여 국가를 위해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이고 훌륭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곳에 모인 목사들은 살인 독재를 일삼던 독재자도 예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정권도 축복했고, 권력을 위해 시민을 학살하는 사람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기독교인 대통령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했던 곳이 국가조찬기도회입니다. 50년 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종교가 권력자와 야합하고 서로를 돕는 정교 결탁의 장이었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목사가 차마 듣기도 민망한 권력자에 대한 찬양과 아부를 남발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조금 유명해진 목사들은 국가조찬기도회에 초대받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저도 그 기도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회라는 것이 하루 빨리 망해서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법을 지키고 사랑을 행하고 자신의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될 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했던 바울의 한 고백이 생각납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이 약해지면 신을 찾는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인간은 치명적 약점을 알고 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막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요. 자기 능력을 실현하지 못하고 신에게 의지하여서 약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을 오해하여서 아무런 책임도 안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오해입니다. 무책임한 믿음도 오해한 것이고 막스도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거듭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두려운 것 앞에서도 오히려 강하고 담대합니다. 벨릭스 부부는 바울로부터 지적 만족이나 종교적 평안 같은 덕담을 들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하고 담대하며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총독 부부의 인격의 변화와 도덕적 각성을 엄중하게 요구하는 실제적 의미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의에 대해서 강론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벨릭스가 불의한 권력자라는 말이고, 절제에 대해서 강론했다는 말은 벨릭스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런 인간이라는 말이고, 심판을 강론했다는 말은 기어이 벨릭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설 것을 경고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본분입니다. 자신의 재판에 판결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선언하고 나면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불법을 행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할 때 은혜 받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눅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자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겠지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회개했다면 그 증거를 보이라는 말입니다. 가짜 회개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이미 회개가 아닐 것이고, 진정한 회개라면 그 회개의 증거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인 요구를 들어보겠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경제적 약자에게 먹을 것을 분배하라는 것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입니다. 죄짓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도 죄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고는 아무도 악의 자리에서 도망 나올 수 없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이 있었지요. 하루에 10만 명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5초에 1명 꼴로 어린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도 명백합니다. 탐욕의 인간들이 금융자본 즉 세상의 밥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결코 스스로 선의 가치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자본이라는 것은 인격이 아니고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도구이니까요. 그래서 돈은 한 곳으로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당연히 세계의 절반은 굶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전히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야 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할 질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모두가 다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식을 매일 주고 있는데 왜 세계의 절반은 아직도 굶주리고 있느냐. 너희는 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어주지 않느냐.” 여기서 우리 마음 안에 반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아닙니까? 자유경쟁시대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배운 진화의 세계관으로는 약한 것은 도태되어야 마땅하고 강한 것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적자가 생존하여 우수한 유전자로 인해 역사는 진화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회주의라는 것은 인간을 더욱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만들 뿐이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저는 사회주의자 아닙니다.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분배하라는 것은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게 축재하는 세상에 대해서 의로운 양심을 호소하는 것이고, 탐욕에서부터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고, 착취에서부터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무관심에서부터 배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책망을 계속 들어보시죠.「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세금을 부과하는 사람, 즉 정부는 국민에게 과징수하지 말고 서민 부담을 줄이라는 말입니다. 「군병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무소하지 말고」 즉 공권력을 사용하여 국민을 두렵게 하지 말고 법을 악용해 억울하게 국민의 것을 빼앗지 말라. 그것을 권력과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국가공무원은 정해진 월급 이외에 다른 이익을 취하여 권력형 비리를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의 회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밀라노성당에 들어오려고 할 때 황제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주교는 ‘교회도 천국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라고 단호하게 황제의 입장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황제의 도덕적 반성을 요구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4세기말에 데살로니가에서 대규모 주민학살을 자행했거든요. 입으로 믿는다고 말만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가폭력을 멈추고 살육을 회개하고 보상하고 정의와 공평을 결단하고 그것을 정치에 실천하라! 그것이 곧 회개에 합당한 책임을 지라는 요구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조적이며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언 하나 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패한 세상이어서 이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양보하고 포기해야하는 것이 생길 것입니다. 믿음과 세상의 논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믿음의 선택을 한 사람은 결국 손해를 볼 것입니다. 섭섭하지만 그것이 첫번째 예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예언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체험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세금을 횡령하고 배임하고 포탈하는 고질적인 비리 세무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말 그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껏 부당 징수한 것을 다 토해내지요. 뿐 만 아니라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다 합니다. 그냥 기분대로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결단한 것은 율법의 사기죄에 해당하는 배상 규정을 정확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는 사과와 보상을 안하면서 하나님께는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요한은 그런 사람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엄하게 비판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은 죄의 합당한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믿으면 공짜로 구원받고 믿으면 공짜로 죄사함 받는다고 합니다. 원론적으로 맞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에 돈 들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땅에 쏟아 붓고 죽었습니다.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그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감히 공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코 공짜 아닙니다. 죄사함과 구원은 가장 고통스럽고 잔혹했던 사형의 벌로 죗값을 치룬 후의 회복입니다. 복음을 공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가장 비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부패하고 악한 권력자에 대한 덕담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인간을 책망하고 탐욕스런 인간에게 절제를 요구하고 죽을 인간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선언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력자이자 재판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삶과 죽임이 갈리고 구원과 멸망이 갈립니다. 문제는 벨릭스 부부는 그 두려움의 감정의 처리를 뒤로 미루어 버린 것입니다.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권력과 부의 현실로 돌아오면 그 두려움을 금방 잊어버리는 겁니다. 저는 많은 권력과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 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마저도 잠재울 수 있는 믿을만한 것, 그것이 벨릭스의 권력과 부와 지위였고 그것이 곧 벨릭스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지난주 한국의 야당대표가 선출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정적인 그의 고교동창인 한 정치인이 신임 야당대표가 된 45년지기 친구에게 인사를 전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를 인용해서 인사했습니다. 로마시대에 원정에서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행렬 뒤에서는 노예들을 시켜 이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계속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한번 이겼다고 까불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러니 진실하고 겸손하게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친구에게 좋은 말 해준 것 같습니다. 로마시대에 살았던 벨릭스야말로 이 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 벨릭스는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들었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순간 메멘토 모리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행24:25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그러나 그 생각은 3초 밖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애써 지우고, 나는 지금 살아있고 권력과 부를 가졌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돈과 권력이 가진 치명적인 독은 그 자체가 아니고 죽지 않을 것 같이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게으름입니다. 바울이 의를 말하고 절제를 말하고 심판을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영적 게으름은 구원의 길을 막아버립니다.
마귀는 오늘 예수 믿는 것을 내일로 미루게 합니다. 내년이나 10년 후로 미루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까지 만 미루면 됩니다. 오늘이 된 내일은 또 오늘을 내일로 또 미루어 줄 테니까요. 인생은 생각보다 짧아서 마귀의 계획은 곧 성공합니다. 그러나 정작 지옥에 가야하는 날은 다음날로 미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회개할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믿음의 결단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습관입니다. 깨고 나오지 않으면 마귀가 설정한 적정온도 안에서 영혼은 잠들어 버릴 것입니다. 영원한 부와 권력은 없습니다.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됐고 로마 정계에서 영향력은 잃어갔지만 베수비오라는 곳에서 호화생활을 이어가며 살고 있었습니다. 베수비오가 어디인가하면 AD 79년 8월 24일 그 유명한 폼페이라는 도시 전체를 매몰시켰던 베수비오 화산이 있는 곳입니다. 화산이 폭발할 때 벨릭스의 일가족은 거기서 매몰되어 죽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권력이 있으면 많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과 권력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면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멸망시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유대 총독이 교체되는 것이 나오는데 보르기오 베스도라는 이 신임총독도 부임 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메멘토 모리! 우리는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마귀를 너무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인간을 지옥으로 데리고 갈 권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인간이 천국을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우리 눈을 가리는 일 뿐입니다. 인간이 죄짓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귀는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면 그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앞에 가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천국을 없앨 수 없습니다. 지옥도 마귀가 만든 곳이 아닙니다. 마귀가 멸망으로 인간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마귀는 인간을 구원으로 가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면 됩니다.
우에노 서양미술관에 가면 로댕의 지옥의 문이 있습니다. 미술관 정원에 설치되어 있어서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공짜로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의 문은 공짜로 볼 수 있지만 공짜라고 하더라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다음달에 우에노에 벚꽃이 피면 가셔서 한 번 감상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저는 2000년 4월에 일본에 처음 와서 그 주에 우에노에서 하나미를 하면서 지옥의 문을 봤습니다. 지옥의 문을 올려다보면 지옥에서 절규하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의 군상 중에 하나이지요. 자세히 보면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턱을 괴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팔다리가 짧고 배가 나온 사람에게는 옆구리가 당겨서 여간 어려운 포즈가 아닙니다. 오귀스트 로댕은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옥의 문 바로 앞에서조차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지옥의 문 앞에 서서도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습관] 입니다. 생각하기 싫은 지적 게으름, 믿음을 미루려는 영적 게으름,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고 마는 육체의 게으름은 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려보려는 마귀의 손바닥 같은 것들입니다. 저항하십시오. 눈을 들어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임한 구원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사랑할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의 사명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옆구리가 아프더라도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삶과 믿음이 진지해 질 것입니다.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주어지는 한주간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천국을 사는 성도들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