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사도행전 13장 1~12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13: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의 반응은 종교적이라기보다 항상 정치적입니다. 절망의 인생은 구원의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현실적 이익에 위배되면 반대하고 이익이 되면 환영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복음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이른바 기득권자가 그것이 초래할 기존 질서의 혼란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중요한 두 사역자,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손해였을 것입니다. 누가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탁월한 성경 교사를 대신하겠습니까?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이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놓고 다른 사역자를 보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나바와 바울을 구별하여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하셨고 안디옥 교회는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고 바나바와 바울은 그것에 순종했습니다.

 

제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의 항구인 실루기아를 출발해서 구브로섬으로 가서 살라미를 거쳐 바보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바예수를 의지하고 있던 총독은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바예수는 그것을 방해합니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방해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박해도, 개인적 치원의 반대와 망설임도 다 변화의 두려움, 정치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없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예수가 방해하다가 바울에 의해서 시력을 잃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총독은 오히려 그 일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바예수의 방해마저도 총독의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니 구원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익에 묶인 비열함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할 수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