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장1~12
26: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6: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26: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26: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을 심문하자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간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부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후 자신이 만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간증합니다. 부활로 시작한다는 것은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경험보다 강력한 전도는 없습니다. 전도(伝道)가 공감이 되려면 자신이라는 전도체(伝導体)가 필요합니다. 내 인생을 투영해서 비추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결국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배운 교리를 되뇌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 사람을 이끌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내가 만난 예수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예수를 만난 이야기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의 부활을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바울이 인생을 전도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간증하고 전도했기에 그 안에 있는 믿음은 항상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전도하지 않으니 믿음이 늘 침묵하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언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