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イ・ジョンウ 神父 著「しろかね夕焼けの池の波」中

私は今ここで四旬節の断食や禁肉について話すつもりはない。一食を断食する程度のこと、肉を食べないこと、あるいはそれを数え間違えたことで常習的に懺悔すること、そんなことに真の悔い改めと償いがあるとは言いたくない。批判を断食し、賞賛の晩餐を楽しみなさい。短気を断食し、柔和の晩餐を楽しみなさい。嫉妬を断食し、愛の晩餐を楽しみなさい。偽りを断食し、真実の晩餐を…自分のための言い訳を断食し、責任の晩餐を…不満を断食し、感謝の晩餐を…わがままを断食し、奉仕の晩餐を…恐れを断食し、信仰の晩餐を楽しみなさい。私たちはこれらを長い間忘れたまま生きてきた。食べ物の量や祈りの時間、献金の大きさではなく、真実な生き方、愛の真価が大切なのではないか。もうこれ以上食べるものや持っているものにばかり焦点を合てたり、それらを問題にしてはならない。今日、私たちの信仰の現実において、非人間的なこと、非人格的なことを先に断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ような省察と自覚から根本的な精神の改革が求められる。いわゆる発想の転換とともに、信仰の正しい意味と中身を取り戻す四旬節になることを願う。

イ・ジョンウ神父(詩人)著「しろかね夕焼けの池の波」中 

ユダが腐敗していたヨアシュ王の時代、預言者ヨエルは、悔い改めの断食を命じた。しかし、ヨエルは形式主義を警戒し、衣を破るパフォーマンスは止め、心を引き裂く悔い改めを促した。 ーヨエル2:12,13「しかし、今でも──主のことば── 心のすべてをもって、断食と涙と嘆きをもって、わたしのもとに帰れ。」衣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心を引き裂け。 あなたがたの神、主に立ち返れ。ー 衣を引き裂くことが間違っているのではなく、心を引き裂かないことが間違っている。断食することが問題ではなく、悲しみの心のない形だけの乾いた心が問題であるという。四旬節に各々が定めた節制と禁欲を実践し、十字架を黙想する敬虔というのはいかに美しいことだろうか。ところが、真の悔い改めのために引き裂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ころ」というのは、どこにあるのだろうか。心がどこにあるのか知るために、まず辞書を引いてみた。辞書では、心を意味する「レバブ」を「内面の人、思いや感情の座、良心、勇気、そして理解」としている。(Kohlenberger / Mounce Hebrew.)衣を引き裂くことが「怒りと悲しみの惨憺たること」の表現であれば、心を引き裂くということは「内面の考えや感情のみじめさに悲しみと怒りを持つこと」となるのだろうか。イ・ジョンウ神父の表現を借ると、鈍くなってきた良心を断食し、正義の晩餐を楽しむこと、現実にへたり込む卑怯さを断食し、勇気の晩餐を楽しむことが、心を引き裂くことであると言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果たして私たちは四旬節にそのように心を引き裂く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そういう意味では、四旬節の6週間というのは決して長いとは思わない。

 

이정우 신부의 「은빛 노을 못물결」에서

 

나는 지금 여기서 사순절의 금식이나 단식과 금육(禁肉)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한두 끼니의 밥이나 육류를 먹든 말든, 그걸 잘못 셈했다고 상습적인 고해성사를 보든 말든, 참된 회개와 보속(補贖;속죄)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비판을 금식하고 칭찬의 만찬을 즐기라. 성미 급함을 금식하고 온유함의 만찬을 즐기라. 질투를 금식하고 사랑의 만찬을 즐기라. 거짓을 금식하고 진실의 만찬을…자기 핑계를 금식하고 책임의 만찬을…유감을 금식하고 감사의 만찬을…이기심을 금식하고 봉사의 만찬을…두려움을 금식하고 믿음의 만찬을 즐기라. 우리는 이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아왔다. 먹을거리 같은 것의 양이나 기도와 헌금의 수가 아니라 진실한 삶의 질과 사랑의 진면목이 문제인 것이다. 먹는 것, 가진 것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거나 문제 삼지 말자. 오늘날 우리네 신앙현실에서 비인간적인 것과 몰인격적인 것을 먼저 금식해야 한다. 그러한 성찰과 자각으로부터 근본적인 정신의 개혁이 요구된다. 이른바 발상의 전환과 더불어 믿음의 올바른 뜻과 내용을 되찾는 사순절이었으면 한다.

「은빛 노을 못물결」 이정우 신부/시인

 

유다가 부패했던 요아스 왕 시절, 선지자 요엘은 회개의 금식을 촉구했다. 그러나 요엘은 형식주의를 경계했고 옷을 찢는 퍼포먼스를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라고 했다. -요엘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옷을 찢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을 안 찢는 것이 문제였다. 금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애통한 마음이 없는 건조한 형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순절에 각자가 정한 절제와 금욕을 실천하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경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 찢어야 한다는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은 마음에 사용된 「레바브」를 내면의 사람, 생각과 감정의 자리, 양심, 용기, 그리고 이해라고 했다.(Kohlenberger / Mounce Hebrew) 옷을 찢는 것이 분노와 슬픔의 참담함의 표현이라면 마음을 찢는 것은 내면의 생각과 감정의 참담함에 대해서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정우 신부의 표현을 빌려 쓴다면 무뎌진 양심을 금식하고 공의의 만찬을 즐기는 것, 현실에 주저앉은 비겁을 금식하고 용기의 만찬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순절에 그 마음들을 찢어낼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사순절의 6주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