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1~13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22: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22:5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22:9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22: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22: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22:12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22:13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을 맞았습니다. 유월절에는 반드시 어린양이 필요합니다. 출애굽의 때부터 그것을 잡아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양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마치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예배드릴 때 속죄양이 필요했고 그 양이 이삭이 되어야 했던 것처럼 2천 년 전 예루살렘 유월절의 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다만 이삭과 예수님이 다른 것은 아브라함의 때에는 이삭 대신 하나님의 준비하신 양으로 제물을 바꾸어 드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삭처럼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피 흘리는 제물로 드려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마가복음 15:31」 십자가 이야기 안에는 인간의 악한 의도의 말이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중의법이 되는 경우가 자주 발견됩니다. 요한복음 11장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50」 이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는 말도 중의법의 한 의미로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겠지만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결과이고 저주이고 징벌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개인의 죄는 아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순종했을 때부터 대속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이미 모든 죄가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 덩어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속죄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으니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는 대속제물에게 죄를 전가하지만 제물은 더는 전가할 대상이 없습니다.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로 인해 피 흘리지 않으려거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머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고난주간에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는 부활절을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거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와 동시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들과 내통하여 예수님을 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신의 준비를 하고 있고 그것은 십자가를 추진하고 계신 하나님의 준비로 통합되어 귀결됩니다. 여기서 오해 하나를 정정해야 합니다. 이 본문을 읽는 우리의 감정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음모에 대한 경악이나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과 나는 그들처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교훈적 적용은 십자가 묵상의 주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라는 복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유는 나의 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이렇게 엄숙하고 단호하게 흘러갑니다. 십자가의 배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늘 미워하고 늘 모함하고 끊임없이 배신하고 서로를 죽이고 자신의 이익을 찾으며 속이는 지금의 우리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묵묵히 그런 인간들의 대속을 위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눈에는 이 십자가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파는 유다와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그것에 순종하여 십자가로 올라가 못 박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